구례 5일장 구경
지난 3일 개천절 휴일 지리산을 끼고 있는 구례에 다녀왔다. 그간 보고 싶었던 운조루를 구경하고 오는 길에 구례 5일장을 들른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해당일이 매월 3일, 8일에 열리는 구례장날이어서 딱 좋았다. 지리산 산골에 있는 구례는 의외로 권역이 넓다. 섬진강을 따라 하동이 지척이고, 곡성과 잇대고 있으며, 순천, 광양, 남원과도 가깝다. 지리산에서는 풋풋한 산나물이 내려오고, 순천 여수에서의 갯것들이 올라온다. 섬진강에 기른 것들도 죄다 구례장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지리산에 둘러싸여 길이 험해 주변에 이렇다 할 장이 없는 관계로 사람들은 모두 구례장으로 모여 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동 쌍계사에서 경봉스님을 시봉하던 법정스님도 쌍계사에서 걸어서 구례장까지 오갔다는 일화가 있다. 구례장을 보고 걸어서 오느라 탈탈 굶고 점심시간을 넘겨 오게 되었는데, 경봉스님은 공양시간이 지났다며 밥을 주지 않아 하루를 굶고 말았다는 법정스님의 수필은 구례장이 얼마나 큰 장인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지금도 절의 스님들, 지리산 도인들도 죄다 다 구례장에 물건을 사러 온다고 한다.
정오 즈음에 구례장에 도착했는데 잠깐 한산했지만 잠시 후부터 본격적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구례장에는 인근 지역 농민들이 직접 키운 말린 고추, 마늘 등 농산물은 물론이고 산나물, 약초, 해산물 등이 풍부했다.
약초전에는 종편방송에서 소개된 벌집을 팔고 있는 것이 특이했는데, 벌집 중 술에 담가먹으면 신경통에 특효라는 말벌 벌집이 눈에 띄어 특이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말벌들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말벌들과 벌집을 냉동실에 직행시켜 기절(?)시킨 뒤 유리통에 소주와 함께 넣어 봉해 놓고 6개월 후에 그 술을 매일 한 잔 마시면 신경통에 특효라나 뭐라나.
약초전에는 그 외에도 산에서만 난다는 돌배, 구찌뽕, 운지버섯, 상황버섯, 싸리버섯, 노루궁뎅이버섯, 삼채, 산더덕, 산도라지, 하수오, 송이버섯 등 일반 재래시장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진귀한 물건들이 즐비했다.
건강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증가한 현상을 반영하기라도 하듯이 크게 자란 상태의 와송도 눈에 띈다. 항암, 고혈압에 특효라는 잘 말린 여주도 눈에 띄었는데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없어서 사진을 찍기가 민망해서 관두었다. 큰 됫박에 넘치도록 담아서 만원을 받고 있었는데 내 경험상 그 정도 분량이 되려면 잘 자란 큰 여주 9~10개는 말려야 할 것으로 보였다. 옥션 등 인터넷 상점에서 파는 가격과 비교해보면 반의 반 값도 안 되는 가격이다. 주말농장에서 수확하여 말려둔 여주가 집에 없었다면 한껏 샀을 것이다.
햇볕에 바짝 말린 태양초는 100m 골목을 거의 다 점령하고 있었는데 앞서 가던 지인은 기계로 말린 것과 햇볕에 말린 것을 금방 구분해내었다. 자연스럽지 못한 붉은 빛깔이 금방 눈에 띈다는 것이다. 가격을 물어보니 태양초가 기계에 말린 것보다 위의 투명한 비닐주머니 당 오천 원 정도 비싸다. 행여 중국산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중국산 고추는 컨테이너에 적입할 때 단단하게 눌러서 포장되기 때문에 쭈굴쭈굴한 상태라서 금방 표시가 나서 이곳 장터에서는 팔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수근이 '1박2일'에서 먹었다는 쑤구레 국밥집앞에는 줄이 서있을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 그래서 그집에는 가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소머리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시골장 답게 값도 싸고 양도 많았다. 그런데 이수근이 누구지?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신기한 배를 발견했다. 사과 보다는 조금 크고 배보다는 크기가 작은데 주인에게 물어보니 ‘황금배’라고 했다. 그러니까 색깔이 하얀색에 가까운 노란색이었는데, 과거 한 때 유행했던 ‘인도 사과’처럼 생긴 놈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사과 배’라고 지적하니 주인은 반색을 하며 ‘황금 배’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 ‘황금 배’를 좋아하는 사람은 1년을 이 배 수확하기만을 기다리며 지낸다는 것이다. 어른 남자 주먹 보다 조금 큰 사이즈였는데 여섯 개 만원했다. 사서 먹어보니 달디단 사과와 바나나를 섞은 맛인데 배보다 더 시원한 것 같았다. 내가 신기해하니 주인아주머니는 명함을 주며 전화로 주문하면 언제든지 택배로 보내겠다며 연락을 부탁했다.
어물전도 볼만했다. 주변에 하동, 여수, 순천 등 바다 도시가 가까운 탓인지 갖가지 어물들이 풍성했다. 섬진강 참게는 물론이고 요즘 한창인 전어를 회쳐서 포장을 해놓기도 했다. 갈치도 비늘이 상하지 않은 ‘시퍼런’ 상태였다. 이건 뭘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경상도에서 ‘꼬시래기’라고 부르는 망둥어가 있고 농어 새끼, 돔도 눈에 띄었다.
과거 100동이 넘는 함석지붕이 기와 장옥으로 전부 바뀌었다고 한다. 낡은 흑백 활동사진을 돌리듯 느리고 아득했던 시골장의 풍경이 반듯한 기와 장옥으로 변한 것이다. '재래시장 현대화사업'을 한답시고 구획을 그어서 정리하고, 반듯한 기와로 장옥을 이어 새로 단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일부 골목에는 몸을 잇댄 함석지붕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손때 묻은 기둥과 함석지붕에 그대로 남아 있다. 구례장은 때로는 시간을 지우면서 세월을 담아 흐르는 강처럼 고고하고 볼거리 풍성해서 요즘 보기 드문 5일장의 진수를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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