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로 예술 영화의 진면목을 보여준 영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1990년 발표된 이 영화는 제목이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으로 되어 있지만 외설 시비로 유명한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의 소설이 아니라 그의 정부(情婦)인 아나이스 닌의 작품인 <헨리와 준 (Henry & June)>을 토대로 하고 있다. 아나이스의 삭제되지 않은 일기를 바탕으로 필립 카우프만 감독이 아내와 함께 각본을 써 탄생시킨 이 작품은 ‘금지된 성’의 소설가인 헨리 밀러의 작품 못지않게 상당한 물의를 일으킨 끝에 미국 심의등급인 ‘X'등급을 개선시킨 영화로도 유명하다.
필립 카프만 감독은 `프라하의 봄'과 `떠오르는 태양'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영화는 아나이스의 일기에 대해 계속 언급하면서, 그녀가 작가인 헨리와 그의 아내인 준을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그들을 어떻게 사랑했고, 성적으로는 그들을 어떻게 갈망했으며, 그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자신을 보았는가를 묘사하면서 지적 에로티시즘의 정수를 제시한다.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촬영상만 노미네이트되었고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관객이나 비평가의 시선을 끌어 멋진 영화로 찬사 받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보헤미안들이 설치던 1931년의 파리, 아나이스 닌(마리아 메데이로스)의 말대로 그녀의 시작은 너무나 순진했다. 문학에 뜻을 둔 휴고(리처드 그랜트)와 살고 있지만, 왠지 따분하다. 그녀는 의사와 거침없는 섹스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발레를 배우기도 하지만 돈만 중요시하는 남편에게 싫증을 느낀다. 살아 숨쉬는 사람, 자신보다 더 개성이 강한 사람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어느 날 그녀는 D.H.로렌스를 옹호하는 작품을 써서 책을 출판할 업자를 찾으려 한다. 당시에 여자가 섹스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일이었다. 아내를 사랑하는 휴고는 두 명의 작가, 리차드 오스본(캐빈 스페이시)와 헨리 밀러(프레드 와드)를 집으로 초대해 그녀를 만나게 한다.
헨리는 준(우마 써먼)과 결혼한 작가로 방랑벽과 자유분방한 정신, 성적 방탕함 등으로 이미 유명한 작가다. 그는 성을 삶을 일부로 보며 누구와 섹스하든 상관 않는 난교자(亂交者)이다. 아나이스는 그의 놀라운 영감과 강한 에너지, 거칠 것 없는 자유정신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한편 헨리의 아내 준 역시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 같은 매력과 관능의 아름다움을 지닌 미인으로, 배우 일을 찾아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불법적인 일로 돈을 벌어 남편이 글 쓰는 것을 도우는 헌신적인 여자다. 처음에 헨리와 자유분방한 섹스행각을 벌이던 아나이스는 헨리의 아내인 준을 보자, 이번에는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어 동성애에 휩싸인다. 준의 출현과 함께 아나이스는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아나이스는 성적 경험의 한계를 초월한 순수함을 느끼고 싶어 하지만 자기만의 세계를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준은 그녀를 뒤로 한 채 떠나버린다. 그 후 아나이스는 헨리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고 주체할 수 없는 열정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아나이스와 헨리는 서로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불을 지핀 후 헤어진다. 아나이스는 상냥한 남편에게 돌아간 후에도 몇 번의 연애를 거듭했다. 헨리 또한 결혼을 세 번 더 했다. 그리고 이들은 평생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로 남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그리고 사후에도 서로의 일부가 되었다.
이 영화는 소설가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 준, 그리고 일기작가인 아나이스 간의 미묘한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실제로 존재했던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아나이스가 쓴 일기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원제 Henry & June)을 토대로 만들어져 사실감을 더한다.
이 영화는 포르노스러운 장면이 나오지 않으며 야한 정사장면이나 노출장면 또한 드물다. 그러나 야하기 짝이 없는 영화다. 이 영화는 1930년대 파리를 무대로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 준, 그리고, 이 부부를 동시에 사랑하게 된 여류작가 아나이스가 벌이는 쾌락의 여정을 고급스런 영상과 화술로 풀어낸다. 레즈비언 섹스와 이성간의 섹스를 그린 이 영화는 한마디로 섹스에 관한 것으로 대담하게도 에로틱한 입장에서 아이덴티티의 탐구와 성의 자유라는 주제를 심각하고 단호하게 표현한 걸작이다. 감독의 기지가 번뜩이며, 솜씨 좋고, 용맹스럽게 예술적이며 지적이다. 테마와 자극적인 면에서 진지하고 두드러지게 개인적이다. 그리고 아이디어와 표현에 부끄러움이 없이 진취적이다.
헨리 밀러는 억압된 의식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부르짖으며 금세기 최고의 성애문학 거장으로 올라선 작가답게 남성의 본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활력 넘치는 사나이로 묘사된다. 신비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의 아내 준은 다양한 성적 체험과 자유분방한 생활방식을 선호한다. 이에 비해 비교적 보수적이며 수동적인 아나이스는 헨리 부부의 매력에 빠져 둘 모두와 정신적, 육체적으로 관계를 맺는 파격적인 변신을 감행한다.
♣
아나이스는 헨리 밀러 부부와 개별적으로 친해지면서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기존의 관습과 제도들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깨달아 간다. 아나이스는 이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성적 모험에 몸을 맡기기도 하면서 자유의 폭을 넓혀간다. 그러나 아나이스와 헨리 간의 관계가 알려지는 순간 준은 둘의 곁을 떠나고 아나이스 역시 헨리와 이별하고 남편에게 돌아감으로써 이들의 관계는 기존의 관습에 따라 정리된다.
마약과 성적 방종에 휩싸인 음침한 파리 뒷골목을 청색 톤으로 그려낸 색감과 미학적 요소를 고려해 최대한 절제된 정사신이 인상적이다. 우마 서먼과 마리아 드 메데리오스 등 두 주연배우가 풍기는 청순하면서도 신비한 매력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볼거리다. 이 영화는 원작의 시점과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혀 손상하지 않으면서, 성격묘사가 충분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성애의 소재들을 플롯과 영화의 속도에 잘 통합시키는 듯 하다.
카프만은 모든 장면에 필요한 분위기를 영상미로 소화하며 에로틱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물론 촬영을 찬란하게 함으로써 영화는 온통 초현실주의적인 접근을 유지했다. 촬영부문에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헨리 밀러(1891 ~ 1980). 미국 소설가. 뉴욕시 브루클린구(區)에서 자랐다. 뉴욕 시립대학을 중퇴한 후에 전신회사(電信會社), 무허가 술집 경영 등 온갖 직업에 종사하면서 규칙이나 제도에 반발하여 미국 각지를 방랑했다. 다양한 직업을 거치면서 화려한 여성편력 끝에 결혼과 이혼을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나, 작품은 모조리 출판을 거절당했다. 끝없이 자유분방한 예술가이며 성(性)을 솔직하게 표현한 자전적 소설을 발표해 20세기 중반 문학에 자유의 물결을 일으켰다. 자유롭고 쉬운 미국적 문체를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이 숨기는 감정을 기꺼이 인정하며, 선과 악을 함께 받아들임으로써 비롯된 희극적 재능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작들이 성을 솔직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프랑스에서 복사본이 몰래 들어와 처음부터 널리 퍼졌다. 1922년 처녀작인 『잘려진 날개』를 완성하고 1929년 『이 이교적인 세계』를 썼으며 1934년 『북회귀선』을 출판함으로써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1980년에 작고했다. 저서로는 『검은 봄』『북회귀선』『남회귀선』『성의 세계』『추억에의 추억』『섹서스』『사다리 아래의 미소』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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