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영화감독 하길종과 영화 <화분>
1938년에 집필된 이효석의 소설 <화분>은 당시대에서는 파격적이게도 '동성애' 장면이 등장해서 충격을 주었다. 이 소설은 대중들의 심리 속에 잠들어 있다가 1972년 하길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푸른 집'에 어느 날 파고든 남자가 집안의 모든 식구들과 관계를 맺고 탐욕과 질투로 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한다는 내용은 1930년대가 아닌 1970년대로서도 꽤나 충격적인 소재다. 그러나 원작 소설이 갖고 있는 알레고리의 도식에 경도된 듯한 난해한 이야기는 영화의 특징이자 한계일 수밖에 없다.
하명중과 남궁원이 벌거벗은 상체를 드러내고 침대에 누워 애무를 하는 장면은 <로드 무비>가 나오기 전까지는 가장 화끈한(?) 동성간의 러브 씬으로 알려져 있다. 이효석의 1939년작 소설이 동성애를 다루고 있었던 점도 충격적이지만, 1972년 군사정권 시대에 유한계급의 허위를 까발리고 자신은 벌거숭이가 되어 떠나는 주인공의 뒷모습은 시대를 앞서는 파격이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 근교 푸른집에 어느날 현마(남궁원)가 단주(하명중)를 데리고 들어온다. 현마의 처제인 미란(윤소라)은 단주와 눈이 맞아 한강변을 거닐다가 폭우를 맞고, 단주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현마는 단주가 거리의 고아였던 것을 데려다 키워줬는데 자기를 배신한 것으로 여긴다. 단주는 미란과 해변으로 도피하나 현마는 단주를 잡아다 린치를 가한다. 그 뒤 골방 안에 유폐된 단주는 식모 옥녀(여운계)와도 이상한 관계에 빠진다. 미란의 언니인 세란(최지희)은 세란대로 단주와의 화끈거리는 욕정의 환상을 더듬는다. 그 뒤 현마가 베푼 파티장은 빚장이들의 습격으로 일대 수라장이 된다. 현마는 그들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친다. 이리하여 푸른집의 허상은 무너지고 세란은 딸꾹질을 하면서 최후를 맞는다. 단주는 패덕한 의상을 벗어 던지고 푸른집을 나선다.
영화의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서울 근교의 개화된 한옥 일명 '푸른집'에서 세란은 현마의 애첩으로 동생 미란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현마가 그의 새 비서 단주를 데리고 오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미란은 단주를 사랑하고 평소 남자인 단주를 사랑하던 현마는 분노가 극에 달해 단주를 구타한 후 골방에 가둔다. 골방에서 단주는 고행을 통해 자신을 극복하려고 하고 그날 밤 현마는 간질 발작을 일으킨다. 물욕주의자였던 현마는 몰락해가며 일본으로 떠나고 푸른 집과 함께 남겨진 세란은 미쳐서 죽고 미란은 집을 떠난다. 허상과 허위로 가득 쌓인 당시 사회를 대변하는 듯한 푸른 집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단주는 어둠에 쌓인 푸른집을 나간다.
하길종 감독의 데뷔작인 이 영화는 이효석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푸른 집’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가학적이고 뒤틀린 욕망의 모습을 통해 유신 정권의 억압성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담아냈다. 개봉 당시 파졸리니의 <테오라마>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논란이 됐었다.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물게 동성애 장면 등이 연출돼 많은 화제가 되었다.
이 작품은 하길종 감독의 미국 유학시절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적 작품세계가 극영화로 이어져 한국영화사상 유례없는 상징주의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영화다. 1930년대 원작인 이효석의 소설과는 무관하게 '푸른집'이 청와대의 상징으로 보이면서, 한국사회의 권력으로 읽으면 <화분>은 고도의 정치적 우화로 드러난다. 하길종 감독이 유학에서 돌아와 만든 이 영화는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전복적인 묘사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 영화의 충격적인 영상 실험은 한국영화의 모더니즘에 대한 최초의 시도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한적해 보이는 변두리 대저택에서 미란(최지희)은 연못에 죽은 금붕어들을 보고 기겁을 한다. 초반부터 강렬한 장면으로 시작한 작품은 처음엔 일견 그럴 수도 있는 듯한 이야기로 진행되다가 기묘함의 극치를 이루면서 나아가는데 1972년이라는 시대를 감안해 봤을 때 파격과 실험정신이 아주 농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미니멀리즘으로 울려대는 신중현의 음악과 적색조명, 단주 역할인 하명중의 넋이 나간 채 어느 한 곳을 응시하는 모습은 작품을 실험영화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행선지를 반복적으로 촬영한 장면이나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파격적인 여러 장면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굉장히 난해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
단주라는 청년이 부르조아의 푸른집을 찾아오고, 모두와 성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떠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많은 부분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파졸리니의 <테오라마>를 연상시킨다. 맑시즘, 섹스, 종교 등의 주제가 혼재되어 있는 파졸리니의 영화 <테오라마>는 매력적인 테렌스 스탬프가 부르조아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가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하녀를 차례로 유혹해 그들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비범한 이방인을 연기한다. 파졸리니는 지배 계급은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섹스로 파괴될 수 있다고 가정하며, 이를 초현실적이고 감각적인 알레고리로 보여준다.
하길종이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허무주의적인 태도는 1970년대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하길종은 이효석 원작의 <화분>을 첫 작품으로 연출하게 되지만 제작비 조달 문제와 여배우 교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고 전한다. 그는 신인배우들을 발굴해 한국영화에 활력을 더해주고 싶었지만 인기 있는 여배우가 없는 영화에 투자하고자 하는 회사는 없었다. 결국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촬영이 지연되는 과정에서 신인 여배우가 중도 탈락하게 되고, 새롭게 캐스팅에 들어가 1972년 어렵게 개봉하게 된다. 하지만 <화분>은 흥행에 실패하고, 청룡영화제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 기성 한국영화계의 보수성에 부딪혀 논란을 빚기도 했다. 제18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출품작이다.
☞하길종(河吉鍾.1941.4.13∼1979.2.28) 영화감독. 부산 출생.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초량의 중앙국민학교와 경남중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입학, 재학 중에 시집 <태를 위한 과거분사>를 출간했고 졸업 후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UCLA)에서 영화이론과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배우 하명중의 친형이다.
1970년 귀국해 <화분>(1972)으로 영화계에 입문했고, 이후 <수절>(1974) <바보들의 행진>(1975) <여자를 찾습니다>(1976) <한네의 승천>(1977) <속 별들의 고향>(1978) <병태와 영자>(1979) 등을 연출했다. 영화감독 활동 이외에 고려대학교·중앙대학교 등에서 영화를 강의했고 서울예술전문대학 영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또한 영화평론가로도 활약했으며 사후에 평론집 <영상, 인간구원의 메시지>(1981)가 출간되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미국 유학시절에 제작한 단편영화 〈병사의 제전>에서 <화분><수절>로 이어지는 실험영화의 제1기와, <바보들의 행진><속 별들의 고향>의 정통 극영화의 제2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그가 영화의 새로운 언어로서의 가능성과 기존권력에 대한 비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기이다. 그 당시 만들어졌던 영화들은 검열당국의 방해, 그리고 관객의 이해부족 등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대중과 만났던 영화이고 그의 영화적 재능이 가장 훌륭하게 발휘된 <바보들의 행진>은 1970년대 유신시대의 암울한 청년문화의 모습을 코믹하면서도 페이소스가 넘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간암(肝癌)으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작품】<병사의 제전>(1969), <화분>(1972), <수절>(1974), <바보들의 행진>(1975), <여자를 찾습니다>(1976), <한네의 승천>(1977), <속 별들의 고향>(1978), <병태와 영자>(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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