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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설국열차> 왜 지루하게 느꼈을까?

by 언덕에서 2013. 8. 20.

 

 

<설국열차> 왜 지루하게 느꼈을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화 <설국열차>를 드디어 보았다. 개봉한 날 보았지만 생각이 뱅뱅 도는 바람에 펜을 들지 못하고 이제야 그 느낌을 몇 자 적어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는데 팽팽한 긴장 속에서 진행되던 전반과 달리 후반부 부터는 다소 생뚱맞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새로운 빙하기 도래 뒤 17년째, 한 대의 기차가 지상에 남은 모든 인간 생존자를 싣고 거대한 순환선 위를 한정 없이 달리고 있다. 이 좁고 긴 '노아의 방주'는 인간사회의 축소판이자 < 메트로폴리스 > 부터 < 매트릭스 > 까지 이어져온 파시즘적 가상세계의 신판본으로 보인다. 기상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태운 기차는 궤도를 끝없이 달린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기생충처럼 살고 있는 빈민굴 같은 꼬리칸과 달리 앞칸으로 갈수록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을 즐기며 호화로운 객실을 뒹굴고 있는 열차 안의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그러니까 인류가 생긴 이후부터 지금까지 존재해온 지구 계급사회의 축소판이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지 17년,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긴 세월 준비해 온 폭동을 일으킨다. 커티스를 비롯해 남궁민수(송강호)와 그의 딸 요나(고아성) 등은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장악, 꼬리칸을 해방시키고 마침내 기차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해 절대 권력자 윌포드(에드 해리스)가 도사리고 있는 가장 앞칸으로 한 칸씩 한 칸씩 향한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았고 언론매체 등을 통하여 대거 소개되었으니 줄거리 설명은 생략토록 하겠다. 영화 내용 중에서 윌포드는 설국열차가 하나의 "폐쇄된 생태계"임을 강조하는데, 그 표현은 영화 밖 현실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기차의 수많은 창문은 밖을 내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탈주도 혁명도 불가능해진 영화 안팎의 세계를 환기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한 곳에 갇혀버린 인간들에게는 희망과 미래는 없다. 기차의 주인인 월포드는 유사 이래 항상 그렇지 않았느냐고 커티스에게 반문한다. 권력이 존재하는 한 반대자가 존재하는 것은 역사의 법칙이다. 열차의 성자로 불리는 길리엄(존 하트)은 계속된 반란시도를 통해 팔과 다리를 잃은 꼬리칸의 지도자였지만 월포드와 항상 내통하던 첩자임이 밝혀진다. 이건 인간의 역사에서 항상 보아왔던 부분으로 '설국열차'가 지구의 축소판임을 재차 가르쳐주는 듯하다.

 

 

 

 

 <설국열차> 는 그동안의 보아왔던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등 봉준호 영화와 궤를 달리한다. 상징과 은유, 풍자를 통해 환기시키던 한국사회의 이슈들이 계급투쟁이라는 직설적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혹은 돌발적으로 매력을 도출하던 일상적 인물들이 외향, 성향부터 강하게 색을 드러내는 캐릭터들로, 장르 속으로 들어가 파괴하고 이질적 요소를 뒤섞는다. 한국적 장르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던 시도에서 장르적 외피를 두르는 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직설화법이 이전의 풍자만큼 예리하지 못하고 영화의 어두운 분위기와 몰입도가 부족한 초반부와 무거운 주제 등은 대중들과 호흡하기에는 다소 거리가 느껴졌다.

 인류 스스로 자초한 새로운 빙하기, 인류는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달리는 기차 안에 몸을 실어야 한다. 각 칸에는 계급이 있고, 인류는 각자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꼬리칸과 앞칸, 중간칸에는 각자의 임무를 짊어진 인간들이 상존한다.

 맨 뒤에 있는 커티스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반란을 꿈꾼다. 맨 앞에 있는 윌포드는 신성한 엔진을 지키며 마지막 남은 인류의 인간성을 규정하려 한다. 이 부분,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인류는 노아의 방주 안 같은 곳에서조차 계급을 조성한다. 그리고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인간성을 상실한 채 약육강식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서로를 잡아먹는 살육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의 꽃을 피우려는 의도조차 다시 딜레마에 빠진다. 혁명이란 결국, 또 다른 계급과 독재를 낳기 때문이다.

 

 

 

 

 <설국열차> 가 드러내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기후변화로 인해 멸망한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것은 환경보존이 아니라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생태계 교란이 아니라 폭파라는 급진적인 결론까지 내놓는다. 이 부분에서는 감독이 관객들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많은 대사를 투입하여 흐름이 늘어지는 바람에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것은 결론이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윌포드가 커티스를 만나 왜 네가 새로운 리더이어야만 하는지 설명하는 부분 역시 영화적 기법으로서나 개연성의 측면에서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장면에서 윌포드는 주저리주저리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이 지점에서 <설국열차> 에 탑승한 관객들 역시 기차처럼 다시 탈선을 경험한다.

 메시지에 반해 이미지는 온건하다. 원작 만화의 설정만 가져와 재창조하다시피 한 작품임에도 그간 보아왔던 봉준호만의 복잡하고 독창적이고 시각적 퍼즐은 자취가 묘연하다. 처음으로 한국이란 지정학적 공간을 떠나 무국적 기차액션영화에 탑승한 탓인지, 보편적 장르의 쾌감에 충실한 탓인지 전작들에서처럼 장르의 틈새를 벌려 문제적인 이미지들을 방류하는 의외의 반전은 없었다. 각 칸에는 정량의 액션만 실려 있고 칸들을 잇는 문도 손쉽게 열리는 탓에, 엔진을 향한 저돌적인 질주에 꼬리칸을 탈출할 때와 같은 밀도가 실리지 않아 아쉬웠다.

 

 어느 신문에서인가 감독의 변으로 "구체적인 한국의 시대, 장소가 없어 허전한 마음도 있었지만 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인류 보편적 드라마이기에 한국적이라 생각하고 작업했다"고 봉준호 감독은 소감을 전했는데 지루했던 부분만 뺀다면 아주 적절해 보이는 멘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