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과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진실
지난 일요일 영화 ‘관상’을 봤다. 역사왜곡이 많은 우리 사극영화에 대한 선입관이 있는지라 별 기대를 않고 보았지만, 보고 난 후에는 근래 보기 드문 좋은 영화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영화가 2010년 한국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 수상작으로 상당히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이유일 것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과 한 관상가의 개인사를 절묘하게 엮은 점이 좋았고 송강호. 김혜수의 연기는 물론 이정재의 살아있는 연기가 압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적 진실이라는 측면에서 실존인물이 아닌 ‘관상쟁이’ 김내경이라는 존재만 빼면 역사의 팩드(fact)를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점도 그렇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역사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그 틈에 낀 이야기의 절묘함이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됐지만 실제는 어떠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살짝 비튼 팩션 영화를 보는 재미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관상을 소재로 했다. 우리 민족은 사주팔자, 관상, 손금 등으로 운명을 점치는 것을 좋아한다. 개인의 의지보다는 운명이 삶을 지배한다고 여겨서다.
‘관상’에서는 역적의 후손으로 산골에 숨어 사는 관상쟁이 김내경(송강호 분)이 문종(김태우 분)도 신임하는 관상쟁이로 등극한다. 역사적 사실이 바뀌지는 않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과연 역사와 김내경의 개인사가 어떻게 엮어질까가 영화 보는 내내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뒤로 갈수록 김내경이 역사의 내부에 깊숙하게 발을 딛는 과정이 매우 흥미진진했다. 빠른 사건 전개로 139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았다.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의 중심사건인 계유정난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 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여건으로는 수렴청정을 할 대왕대비가 없었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다음 날 산욕열로 죽었지만(1441년 세종 23), 문종은 다시 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후궁으로 귀인 홍씨·양씨만을 두었던 것이다. 사실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가 있기는 했으나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후궁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다만 내부에 관한 일을 돕는 일에만 관여할 뿐이었다. 때문에 모든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이른바 고명대신 황보 인·김종서 등이 잡고 있었다.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 출생한 적자는 문종 외에도 수양ㆍ안평ㆍ임영ㆍ광평ㆍ금성ㆍ평원ㆍ영용의 일곱 대군이 있었다. 그 무렵 왕권은 약하고 신권은 강한 형세였다. 때문에 능력 있는 여러 대군은 왕권에 큰 위협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성격이 아주 달랐다. 즉, 수양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주위에 문무에 뛰어난 문객을 많이 모으고 있었다.
반면에, 안평대군은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문학ㆍ예술을 좋아해 이 방면의 동호인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에 수양대군은 처음부터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정치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세 정승 중 황보 인은 성격이 유약하고 남지는 오래 전부터 앓아온 신병으로 정권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실권은 자연 김종서가 장악하게 되었다. 모든 권력은 김종서에게 기울고 있었다.
정사인 <단종실록>은 이들 대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 양씨, 환관 등과 모의해 궁중에까지 세력을 부식하는 한편, 황표정사(黃標政事)라 불릴 정도로 자제를 포함, 많은 당여(黨與)를 요직에 배열해 붕당을 조성했으며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단종실록>이 세조 때 어용사관에 의해 편찬된 것임을 감안하면,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또, 수양대군은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로 즉위한 다음, <경국대전> 편찬 과정에서 제2의 창업지주 혹은 조종지주(祖宗之主)임을 내세웠다. 그는 계유정난이 없었다면, 황보 인·김종서 등이 반드시 안평대군과 모의해 종사를 결단 내었을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수성지군(守成之君)이 아니라 창업주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경국대전>의 체재는 물론, 많은 신법을 제정한 것을 보아도 그의 야망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황보 인·김종서 등은 고명대신으로서 어린 단종을 끝까지 충성을 다해 보필하려고 했을 뿐, 야심을 품고 붕당을 조성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들 대신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국왕을 보필하고 정사를 협의하는 최고 정무기관으로서의 본래 임무를 넘어섰던 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관의 말을 인용하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괴뢰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가 있는 것은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할 정도로 왕권이 미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유교적 비전제정치를 내세워 재상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정인지ㆍ최항ㆍ신숙주ㆍ성삼문ㆍ하위지 등 집현전 출신의 유신도 황보인ㆍ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는 비판적이었다. 뒷날 수양대군이 황보인ㆍ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많은 집현전 출신 관료가 수양대군에 동조하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수양대군도 이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이들이 세력을 더 굳히기 전에 제거할 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수양대군의 생각처럼 황보인ㆍ김종서 등이 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면, 수양대군이 외교업무인 고명사은사로 명나라에 가는 기회를 이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 기회를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한 문객 권람은 수양이 사신으로 가는 것을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웃으며 황보 인·김종서는 호걸이 아니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고명대신들은 수양대군의 행동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수양대군이 거사를 계획한 시기는 단종 즉위 후 2개월이 지난 1452년 7월경으로 예상된다. 이 때 권람이 방문하자 수양대군은 정계의 움직임에 대해 진심을 털어놓았다. 또한, 이때부터 수양대군은 대권에 야심을 품고서 권람ㆍ홍윤성ㆍ한명회 등을 심복으로 만들고 있었다.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은 그가 1453년 4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 급진전되었다.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ㆍ양정 등의 심복 무사를 양성해 거사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이 해 10월 10일 밤, 마침내 유숙·양정·어을운 등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간계를 써서 철퇴로 죽였다. 그리고 황보인ㆍ조극관ㆍ이양 등 여러 대신을 왕명으로 밀소하여 궁문에서 퇴살 하였다.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은 강화도에 안치됐다가 죽임을 당했다. 정분ㆍ조수량ㆍ안완경 등은 귀양 보냈다가 곧 교살하였다. 이와 같이, 김종서 등에게 모반죄를 씌워 무참하게 죽인 것은 수양대군 일파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함길도절도사로 있던 이징옥도 김종서의 일당이라고 하여 파면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을 임명하였다. 이에 이징옥이 분개하여 박호문을 죽인 다음, 휘하 군사를 이끌고 종성을 근거지로 하여 저항하였다. 그는 대금황제라 칭하면서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종성부사 정종의 반간계에 걸려 잡혀 죽었다.
무단적인 방법으로 정적을 숙청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ㆍ영집현전사ㆍ영경연사ㆍ영춘추관사ㆍ영서운관사ㆍ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는 등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였다. 그리고 거사에 직접 간접으로 공을 세운 정인지ㆍ권람ㆍ한명회ㆍ양정 등 43인(수양대군 포함)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2년 뒤에 강제로 단종의 양위를 받아 세조로 즉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은 이 영화 <관상>은 쿠데타에 특별한 시각을 부여하는 것 대신 왕권에 강한 욕망을 지닌 인물 수양대군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춰 역모 과정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역모상을 지닌 설정 외에 그가 왕권을 찬탈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으며, 내경과 팽헌(조정석)의 각고의 노력에도 역사는 역모로 귀결된다. 내경의 아들이 관상에 따라 관직에 나가 변을 당하는 것도 정해진 수순처럼 펼쳐진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꿀 수 없는, 순응해야 할 삶의 궤도에 대한 목소리가 영화 막바지 체념의 정서를 안고 쓸쓸하게 밀려든다.
이 영화‘관상’은 애틀랜타 대한민국 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고 10월엔 미국에서도 개봉된다고 한다. 해외 관객들에게 한국 사극 ‘관상’의 어떤 점이 어필할 수 있을까. 우선 김내경이 아들 진형(이종석 분)에게 쏟는 부성애는 인류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을 만한 소재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운명의 소용돌이가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무게감 있는 이야기 또한 영화 의 키포인트가 될 것이다. 김내경이 천재적 관상가로 권력의 흐름을 잘 타서 성공하지만, 관상을 잘 보는 능력이 그의 삶에 오히려 저주가 되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삶의 아이러니를 부각시킨 점은 운명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서양인들에게도 매력적인 스토리로 받아들여질 것 같다. 또한 송강호와 김혜수의 개성 있는 연기 외에도 수양대군 역의 이정재가 화면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도 볼만하다.
한류붐을 일으키고 있는 조선시대의 단아한 한복도 또다른 볼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역사적 해석'이 새롭지는 않지만 개인이 역사와 관계되는 지점을 잘 포착한 덕분에 ‘관상’은 명품 사극에 등극할 수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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