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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의 집합 『김종삼 전집』

by 언덕에서 2013. 8. 19.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의 집합 김종삼 전집

 

 


우리 현대시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종삼(金宗三, 1921~1984) 시인의 전집. 새로 발굴한 시 47편의 보완으로 시 216편과 짧은 산문글 5편, 그리고 신문 인터뷰 기사 4편 등 김종삼 시인이 남긴 문학적 자료들을 담았다.

 시인 김종삼(1921~1984)은 황해도 은율(殷栗) 생으로 평양에서 광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토요시마 상고 졸업했다. 1942년 동경문화학원 문학과 중퇴 후 1944년 영화 조감독으로 일하였고 1947년 극단 [극예술협회] 연극 음향효과를 담담하면서 유치진(柳致眞)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6ㆍ25전쟁 때인 1951년 대구에서 시 <원정(園丁)><돌각담> 등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57년 전봉건(全鳳健)ㆍ김광림(金光林) 등과 3인 연대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68년 문덕수(文德守)ㆍ김광림과 3인 연대시집 <본적지(本籍地)>를 발간하였다.

 


비옷을 빌어입고


온 終日(종일) 비는 내리고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린다.


二八(이십팔)년전

善竹橋(선죽교)가 있는

비 내리던

開城(개성),


호수돈 高女生(고녀생)에게

첫 사랑이 번지어졌을 때

버림 받았을 때


비옷을 빌어입고 다닐 때


寄宿舍(기숙사)에 있을 때


기와담장 덩굴이 우거져


온 終日(종일) 비는 내리고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릴 때


-시집 <십이음계> (삼애사 1969)


 클래식음악의 전문가, 그 중에서도 바하를 무척 좋아했던 그는 통상적인 의미의 생활력은 없었으면서도 고상한 취미를 가꾸어 갔다. 때 묻은 옷을 싫어하고 와이셔츠도 고급으로만 입고, 소주를 마신다 하더라도 빈대떡 대신 조개 하나로 때우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가장 혐오한 것이 속물근성으로 어느 직장에 있을 때는 아첨배를 박치기하다가 그것이 빗나가 지프차를 받는 바람에 이마에 열 바늘 가량이나 상처를 꿰맨 적도 있었다.

 반공에 투철하면서도 거창학살사건 때는 울면서 시를 쓴 적도 있는 그의 시는 무척 짧은 것이 특징이었다. 보들레르가 ‘긴 시는 짧은 시를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다.’고 말한 것을 그대로 시작(詩作)에 옮기듯이 말이다. 그의 <성하(聖河)>라는 시는 그래선지 딱 석 줄로 되어 있다.


성하(聖河)


잔잔한 성하(聖河)의 흐름은

비나 눈 내리는 밤이면

더 환하다.


- <북치는 소년>(민음사.1979)

 

 

 


 김종삼(金宗三)은 6ㆍ25 때 피난지 대구에서 시작(詩作) 활동을 하고, 1957년 전봉건ㆍ김광림 등과 연대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냈다. 그는 남달리 초현실주의의 특이한 소재와 표현 기법에 있어서 단절과 비약적으로 현대시의 전위적(前衛的)인 실험을 했다.

 


민간인(民間人)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 [현대시학](1971.10) -

 

 초기 시에서는 어구의 비약적 연결과 시어에 담긴 음악의 경지를 추구하는 순수시의 경향을 나타냈다. 이후 점차 현대인의 절망의식을 상징하는 정신적 방황의 세계를 추구하였으며, 과감한 생략을 통한 여백의 미를 중시하였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보이는 특이한 시 소재의 사용과 표현기법의 단절ㆍ비약으로 주목을 끌었다. 그의 시세계는 동안(童眼)으로 바라보는 순수세계와 현대인의 절망의식을 상징하는 절박한 세계로 나눌 수 있다. 현실세계와 거리를 둔 채 고독한 내면의식을 바탕으로 순수지향의 시의식을 펼쳐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현실적인 것과 거리를 가지는 이상세계를 그려내는 그의 언어는 아름답고 간결한 동시에 체념적이거나 암울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 또한 고도의 비약에 의해 어구들 연결시키고 울리는 음향효과를 살린 시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묵화(墨畵)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십이음계>(삼애사,1969)

 

 

 


 음악적 리듬과 회화적 형상화를 중시하는 김종삼 시의 주 기조는 고전주의적 절제의 태도로, 이는 그의 시에서 현실세계를 배제하거나 적어도 현실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양상으로 나타나며, '아이'와 '예술가(또는 예술의 세계)'가 그 대표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시인의 고전주의적 절제의 태도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 곧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추상세계를 지향하게끔 하며 추상세계는 시인에게 있어 때로는 환상적이고 때로는 동화적이면서 평화스러운 일종의 이상향이다.

 하지만 이 이상세계는 언제나 죽음과 연관되며, 끝내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데 이는 시인이 이상을 현실과의 대립 관계에서만 보고 있었다는 반증이며, 1950년대의 시대상황 속에 놓인 시인의 한계의식의 표출이라 할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민음사.1982)


 김종삼은 보헤미안이었고, 무산자(無産者)였고, 생활인으로서 철저하게 무능력자였다. 그의 인생에는 생활이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시와 음악과 술이었다. 1984년 12월 잦은 음주로인한 간경화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만 시인이었다. 때로 그는 자조적으로 ‘나같이 인간도 덜 된 놈이 무슨 시인이냐. 나는 건달이다, 후라이나 까고’라고 내뱉었다. <제작(製作)>이라는 시에서 ‘그렇다 / 비시(非詩) 일지라도 나의 직장은 시이다’라고 선언했듯이 그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시인일 수밖에 없는 순수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