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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김기림 시집 『기상도』

by 언덕에서 2013. 8. 12.

 

 

김기림 시집 『기상도

 

 

 

 

 

김기림(金起林)이 지은 시집으로 1936년 [창문사(彰文社)]에서 간행하였고, 1948년 [산호장(珊瑚莊)]에서 재판하였다. 장시(長詩)를 표방하고 써낸 <기상도>는 <세계(世界)의 아츰><시민행렬(市民行列)><태풍의 기침시간(起寢時間)><자최><병든 풍경><올배미의 주문(呪文)><쇠바퀴의 노래>라는 일곱 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었다.

 

 

 

 

 

 

 괄호 안에 넣은 고딕체까지 합쳐 약 400여 행에 이르는 이 작품은 일종의 문명비판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기상도>의 작중 화자는 세계지도를 따라 여행한다. 그리고 신문의 토픽난에 보도됨직한 사건들을 시 속에 등장시켜 풍자하고 있다. 예컨대 “독재자(獨裁者)는 책상을 따리며 오직/〈단연히 단연히〉 한 개의 부사(副詞)만/발음하면 그만입니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 밖에도 김기림은 외국산의 꽃이름, 국제열차, 항구의 이국풍, 기상도, 세계지도, 외국영사관 등을 등장시켜서, 이 시가 모더니즘의 작품임을 표방한다. 그러나 소재의 기이함이 곧 시정신과 통하는 것은 아니다. 모더니즘이란 단순하게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참다운 역사의식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풍속

 

 태양아

 다만 한 번이라도 좋다. 너를 부르기 위하여 나는 두루미의 목통을 빌려 오마. 나의 마음의 무너진 터를 닦고 나는 그 위에 너를 위한 작은 궁전(宮殿)을 세우련다. 그러면 너는 그 속에 와서 살아라. 나는 너를 나의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사랑 나의 희망이라고 부르마. 그리고 너의 사나운 풍속을 좇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

 

 태양아

 너는 나의 가슴 속 작은 우주의 호수와 산과 푸른 잔디밭과 흰 방천(防川)에서 불결한 간밤의 서리를 핥아버려라. 나의 시냇물을 쓰다듬어 주며 나의 바다의 요람을 흔들어 주어라. 너는 나의 병실을 어족들의 아침을 다리고 유쾌한 손님처럼 찾아오너라.

 

 태양보다도 이쁘지 못한 시. 태양일 수가 없는 서러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 놓고 태양아 네가 오기를 나는 이 밤을 세워 가며 기다린다.

 

 -시집 <기상도>(1936)-

 

 김기림은 서구의 모더니즘 이론을 이른 시기에 비교적 정확하게 익힌 시인이다. 엘리어트(Eliot,T.S.)·흄(Hulme,T.E.)·리처즈(Richards,I.A.) 등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시론을 정립하고 또한 작품화하였다. 따라서 <기상도>의 <시민행렬>에서 보듯이, 기지ㆍ해학ㆍ풍자ㆍ반어 등의 수법을 통해서 일종의 지성적인 시를 써보려 했다.

 

 

축가 겸 시인 이상이 장정한 김기림의 첫 시집 '기상도'

  

연륜(年輪)

 

무너지는 꽃이파리처럼

휘날려 발 아래 깔리는

서른 나문 해야

 

구름같이 피려던 뜻은 날로 굳어

한 금 두 금 곱다랗게 감기는 연륜(年輪)

 

갈매기처럼 꼬리 덜며

산호(珊瑚) 핀 바다 바다에 나려앉은 섬으로 가자

 

비취빛 하늘 아래 피는 꽃은 맑기도 하리라

무너질 적에는 눈빛 파도에 적시우리

 

초라한 경력을 육지에 막은 다음

주름 잡히는 연륜(年輪)마저 끊어버리고

나도 또한 불꽃처럼 열렬히 살리라

 

 - <춘추>(1936) -

 

 

 

 

 

 그러나 모더니즘의 문화적 저변, 철학적 기반에 대한 이해를 확실하게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기상도>는 역시 실험적인 시로 떨어지고 말았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시의 리듬, 음악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데, 그것은 시각적 인상을 제시하는 데에 작자가 지나치게 몰두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작가가 밝힌 창작의도에,

 “한 시인의 정신과 생리에 다가드는 엄청난 세계사의 진동을 한 편의 시 속에 놓치지 않고 담아보고 싶었다.”

라는 말은 음미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나치게 내용 위주로 편향된 프로문학과 기교성으로 치닫는 시문학파의 중간적 입장을 새로운 기법으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아침

 

비늘

돋친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두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幅)처럼 미끄러웁고

오만한 풍경(風景)은 바로 오전(午前) 칠시(七時)의 절정(絶頂)에 가로누웠다

 

헐덕이는 들 위에

늙은 향수를 뿌리는

교당(敎堂)의 녹슬은 종(鐘)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려무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輪船)을 오늘도 바래 보냈다

 

국경 가까운 정거장

차장의 신호를 재촉하며

발을 구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

마님들의 이즈러진 얼굴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본국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여

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의 가족들

샴판 갑판 `안녕히 가세요' `다녀 오리다'

선부(船夫)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에게 맡기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두에 달려 팔락이는 오색의 테잎

그 여자의 머리의 오색의 리본

 

전서구(傳書鳩)들은

선실의 지붕에서

수도로 향하여 떠났다

……스마트라의 동쪽…… 5킬로의 해상…… 일행 감기도 없다

적도 가까웁다…… 20일 오전 열시.……


 

-시집 <기상도>(1936)-

 

 

 

 작품에서 비록 실패했다 할지라도 시대에 대한 감수성과 표현기교를 결합해보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자는 모더니즘 시란 우선 언어에 대한 자각과 현대문명에 대한 감수성, 이 두 가지를 기초로 하여 씌어진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시도에 그치고 말았으나 우리나라 주지주의 문학의 정착에 한 몫을 하였다.

 

 

 

 

 

☞김기림(金起林.1908.5.11∼?) 시인ㆍ문학평론가. 함경북도 성진에서 출생, 호는 편석촌(片石村)이다. 동경의 니혼대학(日本大學) 문학예술과를 거쳐 동북제국대학 영문과 졸업, 경성중학(鏡城中學)에서 영어, 수학을 가르쳤으며, 1933년 [구인회(九人會)] 회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역임했으며, 광복 후 월남하여 한때 곤궁했고, 좌익계(左翼系) [조선문학가동맹]에 휩쓸렸으며, 6ㆍ25 때 피난의 기회를 잃고 납북(拉北)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