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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이수익 시집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by 언덕에서 2013. 8. 5.

 

 

이수익 시집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2000년 시와시학사에서 펴낸 이 시집『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은 젊은 날에 대한 추억, 일상의 사소한 사물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적 체계 속에 담아내고 있다.

 

달과 구름

 

남자도 좀 아는

40대 초반 여자와

 

여자도 좀 아는

40대 중반 남자가

 

어쩌다 우연히 만나면서부터

눈빛으로 서로 마음이 잘 통해

의기투합 끝에

주점에 들러서는 몇 잔 술도 주거니 받거니

나눠 마신 다음,

 

달 밝은 밤

좁다란 골목길을 비틀비틀 어깨동무한 채 걸으며

나 오늘 밤 연애할까, 말까

두 남녀 제각각 이런 생각하는 사이 ㅡ

 

달은 구름 속으로

달은 다시 구름 밖으로

 

- 시집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 (시와시학사 2000)

 

 이수익은 한국 정통 서정시의 맥을 현대적인 호흡과 맥박으로 되살려낸 가장 대표적인 시인에 해당한다. 이수익은 압축된 시어, 명민한 감각, 정갈한 이미지로 구도의 미학을 추구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는 사랑과 슬픔이라는 전통적인 삶의 서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긴장력 있는 시어와 팽팽한 이미지 구사를 통해 새로운 생명력으로 살려내는 명장(名匠)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시인 이수익 (李秀翼.1942∼ )

 

 

 

밥보다 더 큰 슬픔

 

크낙하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

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

슬픔일랑 잠시 밀쳐두고 밥을 삼켜야 하는 일이,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밥을 씹어야 하는

저 생의 본능이,

상주에게도, 중환자에게도, 또는 그의 가족에게도

밥덩이보다 더 큰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

 

- 시집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 (시와시학사 2000)

 

 이수익(李秀翼.1942.11.28∼ ) 시인은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 출생으로  196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 졸업 후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고별>, <편지>가 당선되어 데뷔했다. 한국방송공사 라디오 편성 기획부 차장, 한국방송공사 라디오정보센터 제작위원 등 방송국에서 근무했다.  부산시 문화상(1980),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현대문학상(1987), 대한민국 문학상(1988), 정지용 문학상(1995), 한국방송대상, 한국시인협회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시세계가 지닌 특징은 대상과 인식을 같은 차원에 두고 상호 교감의 일치점이 되도록 선명한 이미지로 처리하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이념이나 철학성에 대한 관심을 두기보다는 인간적인 우수(憂愁)와 비감(悲感)을 형상화하는 데 시의 기능을 부여하는 주지적 서정시를 쓰고 있다.

 

5월 나무처럼

 

사춘기

소년소녀처럼

5월 나무들은 성큼 푸르러

녹음 연대(連帶)를 이루기 시작하느니.

 

그렇게 뿜는 힘 도도하고

하늘로 솟을 듯 즐겁고

당당해,

세상이 마치 저희들 것처럼.

 

그 나무들 바라보며

차츰 엽맥들 무성하게 피어나면

내 눈엔 띄지 않을 그들만의 비밀세계

늘어날 6월 오고, 또한 7월 올 것임을

 

나는 생각하네, 내게도 아름다웠던

지나온 길들을.

 

- 시집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 (시와시학사 2000)

 

 

 

 

 

 맑고 아름다운 서정시로써 이 시대의 어둠을 맑게 정화시켜 주는 소중한 시인의 한 사람인 이수익은 첫 시집 <우울한 샹송>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투명한 지성으로 비애의 정서를 고양시킴으로써 한국 서정시의 황금 부분을 조용히 갈고 닦아온 시인이다.

 

증인

 

거친 물굽이의

날들이었다.

 

때로는 몰아치는 비바람에

넘어지고 피 흘리며,

통곡하는 시대의 뒷골목을 걸었다.

 

빈 밥그릇의 소름치는 굶주림을

덮고 자던 긴 밤들,

 

그리고 때로는 몸을 일으켜

비늘처럼 솟구치던 기쁨을 환호하던 날도 있었으니

 

하늘로 튀어오르는 물의 상승처럼

가슴을 한껏 차오르던

저 희망이라는 것, 기쁨이라는 것,

또는 내일이라는 이름의 화사한 망령들......

 

그런 

격류로 짜여진

 

지금은 마른 껍질 쭈글한 육신으로

사라진 문명의 지문(指紋) 같이

오랜 세월의 증인으로 침묵하며 서 있는 그를

 

나는

<아버지>라 부른다.

 

- 시집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 (시와시학사 2000)

 

  흔히 잔잔한 우수와 비애의 정서, 명징(明澄)한 이미지와 언어의 세계, 상실감 회복의 미학으로 평가받는 그는 평자에 따라서는 소월과 지용의 장점만을 섞어놓은 시인, 또는 타고난 천성의 시인이라는 극찬을 듣는다.

 주요 시집으로 《야간 열차》(1978), 《슬픔의 핵(核)》(1983), 《단순한 기쁨》(1986), 《그리고 너를 위하여》(1988), 《아득한 봄》(1991), 《푸른 추억의 빵》(1995),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2000), 《꽃나무 아래의 키스》(200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