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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신경림(申庚林)의 첫 시집 『농무(農舞)』

by 언덕에서 2013. 7. 29.

 

 

 

신경림(申庚林)의 첫 시집 농무(農舞)


 

 

 

신경림(申庚林)의 시집으로 A5판. 120면이다. 작자의 첫 시집으로 초간본은 1973년 [월간문학사(月刊文學社)]에서 간행되었고, 이를 증보하여 1975년 [창작(創作)과 비평사(批評社)]에서 재간본(B6판. 116면.)이 간행되었다.

 초간본의 체제는 1부에 <겨울 밤><씨름><잔칫날> 등 13편, 2부에 <전야(前夜)><산 1번지(山一番地)><서울로 가는 길> 등 11편, 3부에 <장마 뒤><귀로(歸路)><산읍일지(山邑日誌)> 등 10편이 실려 있다. 4부에는 <산읍기행(山邑紀行)><친구> 등 4편, 5부에 <갈대><묘비(墓碑)><그 산정(山頂)에서> 등 5편으로 총 43편의 시와 백낙청(白樂晴)의 발문(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재간본의 체제는 1∼4부까지는 초간본대로 하고, 5부에 1편을 추가하여 6편, 6부에 <밤새><강(江)><그 여름> 등 9편, 7부에 <어둠 속에서><산역(山役)><동행(同行)> 등 8편을 첨가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61편의 시와 백낙청의 발문, 김광섭(金珖燮)의 <제1회 만해문학상 심사소감(第一回卍海文學賞審査所感)>과 저자의 후기(後記)인 <책 뒤에>를 수록하였다.

 

겨울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 [한국일보](1965.4) -

 

 이 시집은 신경림의 초기 작품세계와 이후 작품의 방향성을 보여 주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농민으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삶에서 신명을 되찾고자 하는 시세계였다. 특히 시 <농무>에서 1960∼197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의 와중에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 붕괴되어 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이 땅에 터를 잡고 있는 농촌 민중들의 삶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즉, 농민들은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이 시집 <농무>는 절망적이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현실을 농민들이 신명난 춤사위를 통하여 극복하려는 의지를 그려낸다.

 

파장(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빛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이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컬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창작과비평](1970) 가을호 -

 

 

 

 

 그렇게 함으로써 시인의 성장 기반이 되었던 농촌 사회에 대한 애정과 시인의 현실 인식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하는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이런 시적 형상은 시인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요적 리듬과 쉬운 시어를 구사하여, 이후 1970∼1980년대 민중문학의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이 작품집은 농촌에서 볼 수 있는 농악(農樂)을 소재로 하여 소란스러움과 적막함을 대비시켜 한국인들이 숙명으로 지니는 정한의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기초로 하여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농무(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시집 <농무>(1973) -

 

 시 <농무>에서 죽음의 현장인 도수장 앞에 와서야 겨우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개짓을 하면서 어깨를 흔드는 농민들의 발버둥은 약이 오르고 악에 찬 농민의 고통이다. 이 고통은 또 다른 숙명을 낳고 무한한 체념과 그리움을 낳는다.

 이 시집의 특징은 구차스런 의식세계의 장광설이 없고 복잡미묘한 시의 구조로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소박, 간결, 무색의 표현으로 복잡한 의식구조에 중후한 파문을 던져 구체적인 현실 상황 속으로 인도해 주는 데에 있다. 이 작품집의 또 다른 신비한 특징은 농촌 현실에 밀착하면 할수록 생명력 있는 활달한 서민사회의 비장미를 창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