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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그 누님들 지금은 뭘 할까?

by 언덕에서 2013. 8. 9.

 

 

 

그 누님들 지금은 뭘 할까?

 

 

 

<1970년대 당감동 입구 사진. 이 사진은 부산진구청이 발간한 책에서 발견했다. '신광라사' 자리는 현재 롯데마트 근처일 것이다. 저 가방을 든 학생 나인지도 모르겠다.>

 

 

 

조그마한 와이셔츠 회사의 공장장으로 월급 생활을 하던 30대의 아버지는 회사가 망하자 피난민들이 몰려살던 당감동(현재의 당감시장 아랫골목) 셋방으로 이사하여 세탁소를 차리셨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공장에서 익힌 다림질과 빨래 등의 기술로 살 길을 모색하신 것이다. 게다가 당감동에는 아버지의 누님인 고모가 동네에서도 아주 큰 방앗간을 운영 중이었는데 매형인 고모부가 뭔가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큰 돈벌이가 되지 못해 겨우 현상만 유지한 채, 윗동네인 동양고무라는 신발 공장 옆의 골짜기 땅을 60평정도 구입해서 방이 세 개인 쓰레트 집을 한 채 지으셨다. 그곳으로 이사를 갈 즈음에는 철도 공작창의 일용직 공무원으로 취직을 하셨다. 그곳에서 받는 돈으로 5명 가족의 생계는 어림없었는지 방 한 칸을 우리 가족이 사용하고 두 칸은 달세를 놓으셨다.  칸칸의 방을 세놓으니 매월 들어오는 월세가 생계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몇 년 후 아버지는 집 뒤의 빈 땅에 방이 세 칸인 쓰레트집을 한 채 더 지으셨다.

 

 

그림 출처 : 글림작가의 세상바라기 ( http://blog.daum.net/e-klim)

 

 

 

 그래서 개울가에 위치한 우리 집은 여섯 세대가 붐비는 다세대 주택이 되어버렸다. 세든 사람들의 면면은 말할 것도 없이 동양고무라는 신발 공장에 근무하는 젊은이들이었다. 이런 연유로 동양고무의 바뀐 이름인 '화승 르까프'라는 브랜드를 지금도 선호하는지 모르겠다.

 세든 이들 중에는 결혼을 한 세대가 둘, 나머지는 모두 시골에서 돈벌려 부산으로 몰려온 시골처녀들이었고 그들의 학력은 대부분 중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정도였을까? 방 한 칸을 사용하는 주인집인 우리 가족은 아들들이 커감에 따라 방을 두 개 쓰게 되었고 우리 가족을 포함한 다섯 세대가 한 울타리에 동거하는 시기가 있었다.  

 우리 가족이 사는 두 칸의 방 뒤에 골방이 있었는데 20대 중반의 동양고무 여사무원이 전문대 나온 백수건달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 둘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남자가 병역 기피자였던 관계로 고졸인 여자는 무직인 애인을 희망 없이 부양하고 있었다. 앞집 친구 창호와 내가 동네 공터에서 공을 차고 있으면 그 남자는 옆에 앉아서 거의 매일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지으신 뒷집에는 밀양 청도면에서 온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다. 영훈이 아저씨 부부. 큰 아들이 부산의 신발 공장에서 작업 반장을 하는 등, 자리를 잡자 중학교를 졸업한 17세의 여동생 처녀를 그 공장에 취업시켜 신혼 1년차 오빠부부와 한 방에서 기묘한(?) 동거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옆방에는 함양에서 올라온 처녀 세 명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딸이 없는 어머니는 이들이 귀여웠는지 틈만 나면 김치를 담아주는 등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나이가 19세 정도인 그 누님들의 이름이 박인숙, 이금화, 최정숙인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정인숙 누나를 유달리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옆방에는 동양고무에서 수송 트럭을 운전하는 30대 초반의 젊은 부부가 살았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을 리 없는 시대였음은 차치하고, 15명이 변소 하나를 사용하니 매일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 줄이 서있는 현상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마당에 심겨진 동백나무 아래서 늘 소변을 봐야만 했다. 잘 자라거라, 나무야. 그때마다 어떤 시선을 느껴야 했는데 함양에서 온 그 누님들은 내가 소변 보는 모습을 항상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 둔 부모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함양에서 온 세 처녀 중 최정숙 누님에게 유독 엄하게 대했다. 통금이 있던 당시 유독 그 누님만 매주 두 세 번씩 귀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작심하고 세 처녀 방에 가서 그들과 뭔가 열심히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화를 나누는 걸 옆에서 들으니, 어머니는 그녀가 같은 공장에서 근무하는 총각과 여관에서 상습적으로 자고 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작심하고 최정숙 누님을 불렀다.

 

 “니 그 총각하고 결혼할 사이가?(너 그 총각과 결혼할 사이냐?)”

 “아니예(아닙니다)…….”

 “그라믄 결혼 안한 처자가 몸을 함부로 굴리도 되나?(그러면 처녀가 몸을 막 굴려도 되니?) ”

 “사랑하는 사인데 어떻습니꺼?”

 “글마는 니하고 결혼 안할꺼라는데 니는 매일 몸 주고, 그기 무슨 사랑하는 사이고?(걔는 너랑 결혼 안할 거라는데 너는 매일 몸을 주고, 그게 무슨 사랑하는 사이냐?)”

 “그건 그거고, 다른 문젭니더.”

 “야가 뭐라카노(얘가 무슨 말 하는거냐)? 후제(훗날) 니하고 결혼할 남자가 이거를 알믄 니보고(너에게) 뭐라카겠노?”

 “ …….”

 “ 너그(너네) 어무이(어머니)가 이걸 알믄 내보고(나에게) 뭐라 칼 지 아나?”

 “ …….”

 어머니는 손을 들었다는 듯 말했다.

 “알았다. 간섭 안하겠다. 칼클케(깨끗하게) 처신해라. 허지만 글마는 나쁜 놈이라는 카는 거는 알고 있어야 된데이(하지만 걔는 나쁜 놈이라는 건 알고 있어야 한다).”

 “ ……. ”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연애지상주의자와 유교문화보유자 사이의 문화충돌(Cultural shock) 같은 게 아닐까 생각된다. 1970년대의 이 그림을 현재의 페미니스트들이 보면 뭐라고 평가할지 궁금하다.

 니체는 말했다.

 '사랑할 때, 여자는 자신을 내던지고, 남자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풍부하게 만든다.'

 내가 그 누님들의 가족이라는 가정 하에서 생각한다면, 니체가 한 위의 말은 그야말로 개소리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고 그 시절 부모님 나이를 더 지나고 보니 뭔가 내 머리 속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 처녀들처럼 어린 나이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견해가 모두 맞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본인들의 필요에 의한 이해 관계에 기반을 둔 계산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윤리학과 논리학, 철학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세상살이에는 항상 기준이 필요한 법이다. 병역기피자인 남자를 먹여 살리며 치열하게 청춘을 바쳤던 뒷방 누님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사랑 때문이라고?

 심리학적인 용어로 다시 설명한다면 ‘자기합리화(Rationalization) ’같은 것이리라고 생각된다. 기계와 함께 돌아가는 공장생활 속에서 자기정체성과 방향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운명'에 자신을 맡겨버렸던 순수한 영혼이라는 표현이 적확하지 않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대책없는 연애지상주의자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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