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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따뜻한 손

by 언덕에서 2013. 8. 16.

 

 

 

따뜻한 손

 

 

 

 

 

 

중2때의 일이다. 우리 집 뒤 작은 언덕에는 형관네가 살고 있었다. 형관이는 나보다 한 살 형이었고 학년도 한 학년 높았지만 어릴 적부터 이웃에 살다보니 친구로 지내던 사이였다. 형관이는 편모슬하에서 네 살 위인 형과 함께 세 명이 한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지금도 어스름하게 기억하지만 유달리 선량하고 고운 얼굴과 심성을 가진 분이 형관 어머니였다.

형관이의 손위 형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유달리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형관이 어머니는 봉재 하청업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형관네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빈도가 심해지기 시작했고 이후 동네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날마다 형관집에서 악다구니 소리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빚쟁이들이었다. 짐작컨대 혼자 몸으로 아들 둘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보내며 생계를 도맡고 있던 형관 어머니에게 재정적인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자 자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사태에 빠지고 만 것으로 생각된다. 형관 어머니는 우리 집과도 친한 이웃이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도 얼마간의 빚을 지고 있는 상태였다. 요즘 돈으로 몇 백만 원 정도 되었을 것이다.

 알고 보니 우리 집 말고도 동네에서는 몇 명의 채권자들이 더 있었다. 소문을 들은 어머니는 ‘아들 교과서도 못 사주면서 모은 돈인데…….’하며 형관이 집으로 달려갔다. 바로 뒷집이었으므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찾아가서 어머니는 빚 독촉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친한 이웃이기에 인간적으로 호소하면 다만 몇 푼이라도 빚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터져버렸다. 여러 사람의 빚 독촉에 고심하던 형관 어머니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경찰이 오고 의사가 검시를 하는 과정에서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마비임이 밝혀졌다.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로부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빚 독촉을 당하던 형관 어머니의 극심한 스트레스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빚 독촉을 하던 이웃들은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 앞으로 빚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하는 걱정은 아예 사라졌다. 사람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모두들 죄인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형관이 먼 친척 어른들이 와서 이틀 만에 쓸쓸한 장례를 치루고 동네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런데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고 3이었던 형관이 형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리 집에 와서 입에 담을 수 없는 갖은 욕설과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개 같은 인간들아! 우리 엄마 살려내라!”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컵의 물이 넘치는 것은 항상 마지막 떨어진 한 방울 때문이다. 형관 어머니에게 빚 독촉한 사람들 중에 맨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람이 우리 어머니였기에 그는 그랬을 것이다. 이웃 중 다른 사람이 마지막에 그랬다면 그는 그 집에 가서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 대문 앞에서 그는 밤새도록 울부짖으며 절규했다. 아버지, 어머니, 형들 모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렴풋이 내가 할 수 있었던 생각은 돌아가신 형관이 어머니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나만이라도 기도해야겠다는 것 정도였다. 이후 그들 형제는 친척집으로 입양되어 동네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골치 아픈 일을 안고 살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잊게 된다는 사실, 그것은 인간 뇌구조가 만든 망각의 장점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몇 달이 지나고 나는 중 3이 되었다.

 당시의 시내버스는 이랬다. 아침 시간, 콩나물시루처럼 꽉 찬 그 속으로 사람을 계속 밀어 넣는 버스안내양이 있었고 그 아귀소굴과 같은 공간 안에서 친구를 만나고 아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는 것이 상례였다. 등굣길, 정류소에서 버스를 타고 다섯 정거장 정도 갔을까.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람들을 비집고 안내양 옆 버스 문 쪽으로 정신 없이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 누군가 하며 내 손을 잡고 있는 이를 쳐다보니 형관이었다. 나보다 한 학년 위인 형관이는 명문 상업고등학교 교모를 쓰고 있었다. 순간, 나는 표현하기 힘든 죄책감 때문에 온몸이 마비된 듯 멍하니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나는 충격 흡수마루가 깔리지 않은 곳에서 기계체조를 하는 것처럼 힘이 들었다. 형관이는 내 생각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우연한 만남을 반가워하고 있었다. 형관이……. 이형관인지 김형관인지 잘 모르겠다. 그것이 어린 시절 내 친구 형관이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날 고의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짠해진다. 형관이가 그날 내게 차갑고 냉정한 표정을 지었으면 평생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살지는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그 시절, 앞집에는 둘도 없는 동갑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부모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그분들과 내 부모님 역시 막역한 친구사이였다. 죽마고우인 그와는 서로의 결혼식에서 한번 만나고 이후로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서로 사느라 너무 바빴던 탓으로 거의 20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명문대 공과대학 금속학과를 나온 친구는 IMF 사태로 실직한 후에 그야말로 숨쉬기조차 힘든 중년을 보냈다. 그러다 내 어머니의 장례식에 연로한 부모님을 대신하여 그가 문상을 왔기에 재회하게 되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그날 이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와 나는 자주 만나서 신세타령을 하며 소주잔을 만졌다. 친구 역시 그랬는지 나를 만나면 모든 긴장이 풀어지는 듯 그간 성인이 된 후에 맛봤던 삶의 신산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느 날, 큰마음을 먹고 친구에게 위의 형관이 이야기를 했다.

 “형관이 알지? 우리 뒷집에 살았던…….”

 “기억하지. 그럼……. 이야기해봐라.”

 형관이 어머니의 죽음과 나의 죄책감, 이후 버스에서의 스치듯 이뤄진 짧디 짧은 만남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내 이야기를 쭉 들은 친구는 간단하게 결론을 지으며 대답을 마쳤다.

 “그때는 너무도 가난했을 때, 다들 그렇게 살았잖아. 누구 잘못이라고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빚 독촉을 했던 어머니를 이해하며, 어른들에게 차마 할 수 없는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밤새도록 울부짖었던 형관이의 형을 이해한다. 전에도 썼지만 나는 가난을 경제현상이라기 보다는 운명으로 정의하고 있다. 지나간 시대의 야만과 암흑의 순간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나는 추락하지 않도록 자신을 붙들 수 있는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내가 살았던 방식이 오직 진실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진실이 나의 삶에 항상 명예가 되었다고. 그러나 나를 가장 부끄럽게 만든 것은 형관이와 버스에서 만나기 전까지와 만난 이후에도 죄책감 때문에 끝내 마음을 열지 못했던 나의 소심함이 아닐까 한다.

 

 

- 월간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15. 8월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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