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과 낙지국
군 제대를 육 개월 앞둔 나는 '독수리'라는 이름을 가진 훈련의 여파로 손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독수리 훈련'은 특수부대 등 북의 비정규군이 우리나라 후방지역에 침투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민, 관 , 군이 공동으로 시행하는 연례 야외 기동훈련이다. 독수리 연습에는 연대와 대대급 이하를 중심으로 소규모 병력이 참가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는 해당 지역 육군의 현역 장병과 경찰서의 전투경찰 부대가 출동했다.
내가 근무한 육군 중령이 책임자인 그 부대는 방위병과 예비군을 포함하면 사단급 숫자의 병력이었지만 기실 현역 사병이라고 해봤자 서른 명이 조금 넘었다. 그래서 휴가병과 타 부대로의 파견 중인 병사, 취사병마저 독수리 훈련에 편성되었다. 그리하여 비행기에서 들판이나 골프장으로 떨어지는 특전사 군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한번은 비슷한 위치에 대기 중이던 전투경찰 부대와 우리 부대 병사들이 함께 출동한 적이 있었는데 10km 정도의 거리를 군장이라는 무거운 배낭을 둘러맨 상태로 함께 뛰었다. 경찰서장과 육군 대대장은 어느 부대가 빠른지 내기를 걸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전투경찰 부대는 몇백 명의 인원 중에서 가장 잘 뛰는 이들만 골라서 대기시켰고 우리 부대는 취사병, 당번병, 운전병 등 어중이떠중이까지 동원해서 숫자를 맞춰야 하는 절대 불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대대장은 전경들에게 뒤지면 이유를 막론하고 전원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명까지 내렸다. 중대장도 거들었다. “만약 전경들에게 지면 너희는 방위병보다 못한 놈들로 취급하여 매일 10km 구보를 시키겠다는 실로 살 떨리는 엄포성 발언이었다.
현역 육군이 전투경찰보다 전투력이 뒤지면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늘에서 공수 부대의 낙하산들이 떨어지자 육군과 전투경찰은 처음에는 비슷한 속도로 뛰었으나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전경들은 서서히 뒤처지기 시작했다. 전경들은 주로 데모 진압 연습만 한 관계로 거의 매일 5km 이상을 뛰어왔던 우리에 비해 지구력이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게다가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우리 부대원들이 목표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경 소대는 뒤처져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멀지 않은 눈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낙하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낙하 후 착지(着地)하여 바로 낙하산을 접어서 군장(軍裝)에 넣고 일사불란하게 뛰는 그들의 체력은 과히 세계 최고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낙하산 근처에 가지도 못했지만, 우리가 전경 소대를 가볍게 제친 사실은 대대장과 중대장을 끝없이 즐겁게 만들었다. 대대장은 만족해하며 휴식을 명했다. 문제는 그날 저녁이었는데 다들 긴장이 풀어지면서 사고가 생기고 말았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단기 하사 한 명과 병장 한 명이 으슥한 곳에서 난투극을 벌였고 그 장면을 목격한 내가 말리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이 휘두른 야전삽이 내 손목을 강타하는 바람에 손목 골절상을 입게 되었다. 사고는 대대장에게 즉각 보고되었고 두 병사는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동시에 나는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육군통합병원에 도착하니 환자 중 계급이 낮은 사병들은 선임 입원 병사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등 호된 신고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병장이었고 응급환자였던지라 열외되어 수술과 회복 치료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군의관은 두 달 입원 후 부대로 복귀하면 된다고 했고, 힘들었던 군대 생활에서 모처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수술 후 한 달 동안은 매일 하루에 두 번 혈관주사를 맞았다. 주사 맞는 시간은 새벽 다섯 시와 오후 다섯 시였던 걸로 기억한다.
소위 계급장을 단 어여쁘기 짝이 없는 간호장교가 매일 새벽 다섯 시에 내가 누운 병실에 와서 팔뚝에 고무줄을 묶어 혈관이 피부 위에 튀어나오게 한 뒤 혈관주사를 놓았다. 나는 새벽녘 내 근처에서 인기척이 있을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앉은 자세로 거수경례를 하며 예의를 표했다. 주사 맞는 순간은 고통스러웠지만 천사처럼 생긴 동갑의 간호장교가 나를 위해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수고한다는 것이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내게 “혈관이 잡히지 않아서 윤 병장에게는 주사 놓는 일이 정말 힘들어요.”라는 말을 여러 번 했고 그때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그 간호장교는 국군병원에서 미모면 미모, 성품이면 성품, 모든 면에서 천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그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찰에 달린 그녀 이름과 집이 포항의 죽도시장 뒤편이라는 소문 정도였다.
두 달 후 완쾌된 나는 다시 부대에 복귀하기 위해 사단 보충대에서 일주일을 대기했다. 그곳에서 같은 국군통합병원에서 눈 수술을 받고 나처럼 부대에 복귀하는 김 아무개 병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전남 목포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재학 중 입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단 본부 보충대에서 둘이서만 일주일을 보내게 되니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논할 수 있는 모든 부분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지만 둘의 화제는 단연 간호장교 김 아무개 소위였다. 눈 수술 후 완쾌될 때까지 앞을 보지 못하는 자신에게 김 소위는 옆에서 매일 책을 읽어주며 간병을 해주었기에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 했다. 나 역시 한 달 동안 매일 새벽에 일어나 혈관을 찾으며 주사를 놓아주었던 천사의 존재를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급기야 두 사람 입에서 제대한 후에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이야기가 동시에 나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젊은이들이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자신감만 충만했던 것이다. 둘은 누가 그녀를 차지하는지 내기를 하기로 했다. 한창때고, 여성이면 대부분 호감이 갈 나이인데다 특수한 환경에서 만났으니 그녀가 누구에게나 의무적으로 잘 대해 주어야 하는 위치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같은 달 제대 예정이던 둘은 서로의 집 주소를 주고받은 후 보충대를 떠나 각자의 부대로 복귀했다.
길었던 이야기의 결말을 적어보도록 하겠다.
10월말에 제대하여 맞이한 이듬해 3월의 캠퍼스에서였다. 지도 교수는 40대 후반의 여교수였다. 선생님은 내게 ‘학교는 군대와 다르니까 사회에 적응하려면 워밍업을 해야 하니 천천히 세상과 접해라’는 충고를 주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사회에 더 적응되기 전에 김 아무개 소위에게 용감한 편지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펜을 들었다.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윤 아무개 병장입니다……. 복학했습니다……. <중략>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야 말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는 내용이 요지였던 편지로 기억한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녀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연말이 되었다. 요즘은 거의 사라진 풍습이지만 당시는 연말에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는 것이 지인들에게 중요한 예의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나처럼 그녀를 사모했던 김 아무개 병장에게 크리스마스카드라는 명목의 서신을 보냈다. 염려 덕분에 복학하여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는 내용과 김 소위에게 연서(戀書)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었다는 것, 미역국을 먹은 것 같다는 내용을 적었다.
며칠 후 답장이 왔다.
‘윤형, 저도 무사히 제대했습니다. 복학하여 적응 잘하고 있고요……. 김 소위에게 저도 연서를 보냈습니다. 하하, 물론 낙지국을 먹었지요…….’
그를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가 느꼈던 낭패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심경일 것이므로. 추억일지도 모르고 사랑일지도 모를 그 시간들이 고요히 아주 고요히 침묵과 세월 속에 말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지금 다시 안부를 물어본다. 그리운 길동무들. 지금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 월간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16. 2월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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