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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사라진 고향

by 언덕에서 2013. 9. 27.

 

 

 

사라진 고향

 

 


 

<내외동의 연지공원. 내가 어릴 때는 연지못으로 불리던 곳인데 소먹이던 곳이다>

 

 


내 고향의 행정 주소는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내동이었는데 그 지명은 근래에 김해시 내외동으로 바뀌었다. 할아버지는 제법 큰 농사를 지으셨는데 머슴을 셋이나 두었다. 큰 머슴, 작은 머슴, 꼴머슴 등이다.

 우리 옛 속담에 ‘늙은 쥐가 독 뚫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 일이 있었기에 생긴 속담일 것으로 여겨지는데 나의 할머니는 직접 보셨다고 했다. 어린 시절 나는 방학 때 큰집인 김해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머슴방에 가서 가마니 짜는 것, 새끼 꼬는 것, 멍석 엮는 것 등을 자주 보았다. 할아버지 소유의 논밭이 많았고 집은 컸던 걸로 기억한다. 큰 채, 아래채(사랑채도 있은 것 같다) 또 별채가 있었고 또 뒷간채도 있었다. 뒷간 채는 한쪽은 여자용이고 한쪽은 남자용인 걸로 기억한다. 아래채에는 큰 광이 있었는데 컴컴하고 무서웠다. 그곳에는 큰 독이 아주 많았다.

 일곱 살이 되지 않은 우리들 꼬마들은 숨바꼭질이나 깡통차기 할 때 광에 들어가서 숨으면 들키지 않았다. 광이 넓고 컴컴했고 또 빈 독들이 있어서 개구쟁이들은 큰 독에 들어가 숨었다. 꼬마들이 둘씩이나 들어가는 독이 있었고 그런 독에는 주로 곡식과 고구마, 감, 술 등을 넣어두었다. 그런데 쥐가 많았다. 또 큰 뱀(진대라고 했다)이 쥐를 감아 집어삼키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가까이 가서 봐도 위험이 없었고 어른들은 그 뱀을 ‘찌금’이라고 해서 쫓아내지 않고 그냥 두었는데 내쫓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것이다. 이 큰 뱀은 제멋대로 다녔는데 작은 방, 부엌으로, 광으로, 헛간으로, 심지어 지붕위로 기어 다녔다. 쥐가 많으니 그런 뱀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놀라시겠지만 부엌의 시렁위에 도사리고 있는 것도 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광이 붙은 방에 주로 기거하셨다. 할머니는 허리에 주머니와 함께 열쇠꾸러미를 차고 계셨는데 광을 열고 닫는 것은 할머니의 권한이고 큰어머니나 어머니, 숙모님등 며느리들은 시어머니께 열어 달래서 출입을 했다.

 할머니는 쥐가 독을 뚫는 것을 직접 봤다고 하셨다. 한잠자고 일어나셨는데 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문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신 것이다. 마침 달이 밝아 공기(환기)창으로 달빛이 비쳐 들어와 광의 일부가 환했다고 한다. ‘똑똑’하는 소리가 나기에 유심히 보니 몇 마리 쥐들이 밑에서 받쳐주고 큰 쥐가 입에다 돌을 물고 독을 두드렸다. 어찌하는가 하고 가만히 두니 날이 새도록 계속 되었다는 것이다. 그 쥐들이 독을 성공적으로 뚫어서 곡식을 먹었다고 했는데 과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한 손엔 영어 단어장 들고

가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번 걸을 수 있을까


- 이시영 시집 '마음의 고향4 - 가지 않은 길' 전문



 할아버지는 할머니 몰래 이웃동네 과수댁 할머니를 방에 데리고 와서 주무시다가 할머니에게 들켜 봉변을 당하셨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상당히 재미있게 사신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다. 운명하시던 날 아침 대청마루에서 마당을 내다보시며 "마당에 웬 군인들이 이래 와 있노?" 하셨는데 순간 어린 나를 비롯해 모두들 마당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숨을 거둘 때 저승사자가 나타난다고 하는 속설이 있는데, 내가 직접 목격한 일이라 나는 그 말을 지금까지 믿고 있다.




 

    < 할아버지 회갑 사진.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그날 아침, 아무도 없는 마당을 보시며 왠 군인들이 집에 와 있느냐고 하셨다>

 


 이웃에 우리 집안과 친한 동네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아들이 셋으로 막내아들과 함께 그곳에 사셨는데 패물을 상당히 많이 갖고 계신다는 소문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주머니 하나에 귀한 보물을 넣어 갖고 그 주머니는 항상 차고 있었다. 언제나 몸에서 빼지 않았던 것이다. 위의 두 며느리들은 서로 자기 집에 모셔갈려고 애를 썼다. 큰 며느리는 큰 며느리대로 모실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막내 며느리는 지금 자신이 모시고 있으니 그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며, 가운데 며느리의 주장은 이랬다. 딱 가운데 자식이니 자신이 맡는 게 이치에 맞는다는 이야기였다.

 세 며느리가 서로 모시려고 하니 즐거운 비명이었다. 팔십이 가까웠으니 이제 돌아가실 때도 얼마 남지 않았고 잘만하면 그 주머니에 든 보물은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막상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동작 빠른 큰 며느리가 재빨리 주머니를 챙겼다. 그런데 손아래의 두 며느리들은 불만이 많았다. 큰 동서가 그 보물(?)을 혼자 다 차지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주머니를 장롱 속에 단단히 넣어두고 봉한 후에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그렇게 하고 장사지낸 다음 장롱을 열어보니 똘똘 말은 헝겊에 싸여서 겹으로(주머니가 두 개) 싼 주머니 속에 들은 것은 보물이 아니고 여러 색깔의 작은 돌멩이 몇 알이었다. 며느리들 속만 보이게 했던 유명한 동네의 일화이다. 동네의 글줄이나 읽었다는 문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의 나이 많은 어머님들이여, 절대로 자식들에게 전 재산을 몽땅 주지 말지어다. 다 주고나면 공일이 되는데, 어찌 앞의 그러한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볼일이 있어 창원으로 가다가 나의 옛 고향인 김해시 내동을 경유하게 되었다. 어릴 적 추억 속의 초가집과 들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하여 그 자리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파트 단지만 빼곡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데 그 자리가, 옛날 할아버지집……. 아버님이 태어나고 자라나셨던 그 장소, 내 어릴 적 놀던 장소임을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들, 옛 선비는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네'라는 시를 읊었지만 산천은 못 알아볼 수밖에 없는 현대 도시로 변했고 그리운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 월간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15. 10월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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