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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아주 오래된 기억

by 언덕에서 2013. 6. 28.

 

 

 

 

아주 오래된 기억  

 

 

 

 

 

 


내가 갓 태어났을 때 우리 가족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영주동의 판자촌에서 살았다. 위의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은 1960년대 초반 부산항 전경을 담은 사진인데, 살던 집이 지금의 메리놀병원  부근이라 했으니 사진을 찍은 위치 쯤 될 것이다. 한국전쟁 때 영천전투에서 인민군의 총탄에 다리를 다쳤던 아버지는 국가로부터 상이군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 총상의 후유증으로 한쪽 엄지발가락이 굽어져 있었고 종아리 살 반 정도가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비교적 경미한 장애라는 이유로 상이군인 불가라는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곡괭이를 들고 10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지금은 온천장으로 유명한 동래구 온천동까지 노동일을 하러 다니셨다. 그걸로 겨우 가족들 입에 풀칠을 하였는데 그걸 못하게 된 몇 주일이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 저격범. 안두희1(安斗熙).

 삼십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이야기는 이렇다.

 내가 태어나던 그해 호열자(虎列刺)라고 불리던 콜레라가 유행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피난민들은 다들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지만 영주동 판자촌에는 이촌향도 현상으로 도시로 몰려든 빈민들로 가득했다. 당시 영주동은 부산직할시 중구의 대표적인 피난민촌이었다. 게다가 부산의 중심부인 시청 뒤에 있는 산동네였으니 당연히 인구밀도가 높았다. 우리 가족이 살던 판잣집 근처에는 큼직한 적산가옥(敵産家屋)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에 안두희가 살았던 모양이다. 감기였는지 영양실조였는지 돌이 채 되지 않은 내가 몇 주 동안 고열에 시달렸는데 안두희는 콜레라로 짐작하고 우리 가족이 살던 판잣집 주위에 철조망을 둘러 출입이 불가능하도록 봉쇄해버렸다. 아기는 고열에 시달리고 가족들은 계속 굶고 있는데 동네 양아치가 쳐놓은 철조망 때문에 힘든 노동일마저 할 수 없었던 30대 중반인 가장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안두희는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 특3반에 입교한 뒤 1949년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의 추천으로 한독당원이 되었는데 이는 백범을 죽이기 위한 의도적인 포석이었으며, 당내 내분으로 조작해 배후를 은폐하려는 시도라는 게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현역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개인 저택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으로 백범을 암살하였다.

 그는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중앙고등군법회에서 종신형의 선고를 받았으나 같은 해  국방장관 신성모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의 상신을 받아들여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고, 서울 육군 형무소에서 복역 중 6ㆍ25전쟁으로 인해 1950년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안두희는 그해 7월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의 국방장관 특별명령4호로 육군 소위에 원대복귀하였다. 이후 그는 중위로 진급하였고, 1952년에는 신성모의 명령으로 형이 면제되었으며, 12월 25일 소령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1군사령부 관내 전사단에 공급하는 군납 식료품(두부ㆍ콩나물ㆍ쇠고기ㆍ돼지고기 등)공장인 [신의기업사(信義企業社)]를 강원도 양구에서 1956년 10월부터 10년 정도 창업하여 경영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중형을 면한데다가 1년여밖에 복역하지 않았으며, 석방 후 군부가 군납사업을 알선해 주었던 사실에서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거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심을 할 수 있다고 역사학자들은 분석한다. 이승만(李承晩) 정부 하에서는 국가 공권력이 그의 범행을 은닉시켜주거나 방임시킨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1960년 4ㆍ19혁명 직후인 6월 26일 결성된 ‘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10개월 여의 추적 끝에 1961년 4월 18일 안두희를 붙잡아 김구 암살의 배후를 자백받고 본인의 요청에 의해 검찰에 인계하였으나 조사받기는커녕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거해 형사처벌 불가의 판정을 받았다. 또한 테러당할 우려가 있으니 당국에서 보호조치를 하기로 결정되었으며, 1961년 5ㆍ16군사정변 이후에 귀가 조치되었다.

 1950년대엔 거리를 활보했던 백범 암살범 안두희(安斗熙)는 1960년 4ㆍ19혁명 직후 [백범살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위원장 김창숙)가 결성되면서 ‘도망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안두희는 부산 영주동으로 잠입한 걸로 보인다. 그는‘법적 시효’로부터는 자유로운 몸이었지만 ‘역사의 시효’를 믿으며 그를 응징하려는 사람들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1965년 12월 20대 후반의 청년이던 곽태영(郭泰榮ㆍ백범독서회회장)씨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을 하고 있던 안두희를 공격했다. 그는 칼로 안두희의 목을 두 군데나 찔렀으나 안두희는 세 차례에 걸친 수술 끝에 극적으로 살아났고 그때부터 ‘심판자’들을 피해 더욱 필사적인 은신에 들어갔다.

 1996년 안두희가 박기서씨라는 버스기사에게 ‘응징’을 당하고 척살되었을 때 나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권중희 씨.

 대한민국에 민족정기가 부재함은 백범 암살자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처단하지 못함이라고 믿었던 그는 평생을 그 실천에 옮긴 기개 높은 사람이다. 스스로 만든 단체인 민족정기구현회회장인 권중희씨는 정의를 향한 ‘집요한 응징자’였다. 15세 때 <백범일지>를 읽고 백범을 민족혼으로 받아들인 그는 1980년대 초 안두희가 미국 이민을 시도하고 있다는 신문 보도를 접하고 추적에 나섰다.

 권중희 씨는 1987년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안두희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한 차례, 1992년 세 차례에 걸쳐 응징을 계속했고 이 과정에서 암살 배후에 대한 안두희의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최후의 응징자’는 박기서(朴琦緖)씨였다. 버스운전기사였던 그는 19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안두희의 집을 찾아가 이른바 ‘정의봉’으로 안두희의 머리를 내리쳐 처단했다. 박씨의 집에서는 권중희씨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등 백범 관련 서적 10여 권이 발견됐다.



 인생에서의 의미는 무엇일까? 2007년 권중희씨가 심장마비로 타계하자 아주 오래된 기억, 안두희에게 숱하게 괴롭힘을 당했던 젊은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 항상 가슴이 먹먹해 진다. 6 .25 전쟁 이후 10년 정도가 지났을 그 때, 살기가 참으로 막막할 때, 아버지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며 사셨고 미래를 생각했을까.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인류의 긴 역사를 감안할 때 한 인간의 세상살이는 애매하고 모호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이루지 못한 진정성을 시간이 지난 후에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곤 한다. 삶이라는 인간의 수고는 이해할 수 없는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우연의 본질을 교묘하게 숨기고 단지 단순한 겉모양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선 애매모호한 것은 없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런 점에서 내 어릴 적,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부림쳤던 부모님은 하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월간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15. 7월호 게재 -

 

 

 

  1. ☞백범 김구 암살사건 :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거처하던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된 사건. 안두희는 당시 육군 소위로, 평소부터 김구와 안면이 있는 것을 기화로 정복을 착용하고 동일 상오 11시 30분, 면회를 요청, 소지하고 있던 45구경 권총 4발을 발사하여 안면ㆍ복부 등에 치명상을 입혀 절명케 하였다. 안두희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평소에 존경하던 김구가 귀국 후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정치와 사회의 혼란을 조장하기 때문에 살해한 것이라고 암살 동기를 진술하였다. 범인 안두희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6ㆍ25전쟁으로 형의 집행이 정지되어 석방되었으며, 자유당 정권하에서 중령(中領)까지 진급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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