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철철 흐르는 내 배를 사세요!
<육이오 전쟁 당시의 제주 육군훈련소>
배 사이소! 배 사이소! 물이 철철 흐르는 내 배 사이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배’라는 단어에는 대략 8가지 의미가 있는데, 주로 사용되는 것은 아래의 3가지 용도일 것이다.
1.<의학>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서 위장, 창자, 콩팥 따위의 내장이 들어 있는 곳.
2.<명사> 사람이나 짐 따위를 싣고 물 위로 떠다니도록 나무나 쇠로 만든 물건. 모양과 쓰임에 따라 보트, 나룻배, 기선(汽船), 군함(軍艦), 화물선, 여객선, 유조선 따위로 나눈다.
3.<식물> 배나무의 열매
다변이었으나 자식에게 해 줄 이야기 소재꺼리가 늘 부족했던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세의 아들에게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1950년 8월, 고향인 경남 김해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스물 한 살의 청년인 내게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육이오가 터진 직후 급하게 날라 온 징집이었던 거라. 인민군이 남침한 후 속수무책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철교가 폭파되고, 이후 대전까지 밀리다가 아래의 중부 지방도 무너지던 터라 전황은 절대적으로 국군이 불리했다. 총알받이로 이제 이렇게 죽는구나 라는 참담한 마음으로 전장으로 향해야 했다. 국군들의 대부분은 "인민군이 나타나면 하나 쏴 죽이고 고깃값이나 하고 죽어야지. 내 살값은 해야지"라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전장에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었지. 부산에 급조한 임시 육군훈련소에서 열흘 동안 간단한 군사훈련을 받고 부산역에서 전쟁터로 가는 열차를 탔다. 너도 알다시피 경부선 선로는 초량동에 있는 부산역에서 시작하지 않니? 열차에 빼곡히 탄 병정들은 다들 초조하기 짝이 없는 심경이었다. 부산역에서 20분 정도 열차가 달렸을까? 군인들을 태운 전선행 열차는 부산과 경남의 경계인 구포역에서 잠깐 멈추었다.
전쟁 중이어서 경제는 마비상태였지. 전쟁터로 싸우러 가는 사람들의 삶도 문제였지만, 먹고 살기 막막한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옆에 앉은 동료들은 서울사람, 광주 사람, 대구 사람 ……. 전국 각지에서 징집된 팔도 사나이들이었다. 구포역에서 멈춰선 열차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배(梨)장수 아낙들이 플랫폼에서 열차 창문을 향해 애틋한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는거라.
“배 사이소! 배 사이소! 물이 철철 흐르는 내 배 사이소!”
죽으러 간다는 사실에 모두들 우울해 있었는데 열차 내에서 갑자기 폭소가 터지기 시작하더라.
"야! 저 육덕 좋은 아주머니들, 자기 배에 물이 철철 흐른데? 핫하 ……."
막내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인데 야한 생각에 모두들 즐거워 하고 ……. 우습지 않니, 그쟈?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전쟁 중에서도 유머는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구포의 명물 배(梨)장수 아주머니들은 즙이 많은 과일, 배(梨)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전장으로 향하는 젊은 군인들은 여인의 배(腹部)를 연상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별것 아닌 이야기가 이렇게 기억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요즘으로 치면 썰렁한 유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성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유머는 남녀노소 지식고하를 막론하고 두루 통하는 의미 전달의 가장 효과적인 통신수단이다. 왠가 하면 모든 지성의 궁극적 목적이 유머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도 한마디로 다 웃자고 하는 짓 아닌가? 섹스 또한 모든 사람의 공통된 관심사이자 유머와 유머를 포함하고 있는 쾌락의 적극적 방법이다. 그 밀도가 어느 정도이든 섹스는 모든 개체의 불완전성에 대한 유일한 해결 방안이라는 모 철학자의 말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다. 쉽게 말해, 우리 옛말에 퇴주잔도 형수가 따르면 낫다고 하질 않는가 말이다.
이문열의 전쟁소설 <영웅시대>를 읽으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서 주인공 이동영과 박영규가 만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이지만 폭격으로 사방팔방이 잿더미 엉망이 된 상태다. 전쟁터의 한 가운데, 폐허 속의 남대문 시장에서도 그들에게는 개고기 껍질에 탁주를 팔고 있는 시장 좌판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부분들을 살아가고자 몸부림치는 인간 생명력의 강인함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비단 프로이트의 성(性)욕구 이론 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인간의 나신만한 경이의 아름다움은 없다고 단언하는 미술가들은 수없이 많다. 더욱이 그들이 사랑하는 이성의 나신이었을 때 그들은 신기(神技)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감상자들의 정신 상태를 일러 넋을 잃었다고 한다. 전장으로 향하는 군인들에게 물이 철철 흐르는 배를 사라는 여인들의 외침은 과연 의미대로 전달이 될 수가 있었을까? 그들은 과연 이성적인 가치와 판단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평소에 이성이라 부르는 벗어 던져야 할 외투를 너무 여며입고 있기 때문에 그 주변에 있는 본질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이성이라는 가치는 나약한 인간이 자신의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마련한 교만은 아닐까? 신이 만든 인간의 은밀한 욕망은 우리들 인간이 규정한 가치와 인간으로서의 규율이 극한에 처해졌을 때만이 비로소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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