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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강은교 첫 시집 『허무집』

by 언덕에서 2013. 5. 13.

 

 

 

강은교 첫 시집 『허무집

 

 

 

 

 

 

강은교(姜恩喬, 1945 ~ ) 시인의 첫 시집으로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자전> 연작시를 비롯한 초기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1971년 칠십년대동인회에서 발간되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바라본 존재의 심연을 총 3부로 나누어 담았다.

 

 

강은교(1945 ~ ) 시인

 

 

 

 시인 강은교는 함남 홍원 생으로 출생 후 100일 만에 서울로 이주했다. 1964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졸업 후 1968년 연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했다. 1968년 9월 [사상계(思想界)] 신인문학상에 <순례자의 잠>이 당선 등단하여, 1970년 [샘터]사 입사, 김형영, 정희성, 임정남 등과 등과 [70년대] 동인으로 활동했다,

 1971년 첫 시집 <허무집>을 [70년대] 동인회에서 간행했으며, 1975년 산문집 <그물사이로>(지식산업사), <추억제>(민음사) 간행. 현대문학상(1992), 소월시문학상(1994), 제2회한국문학작가상(1975), PSB문화대상(1997), 정지용 문학상(2006) 등 수상했다.

 

자전(自轉)1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같혀

일평생이 낙과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 소리를 걸어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시집 <허무집(1971)-

 

 강은교의 시는 허무를 직관의 인식작용으로 포착하고, 내면의식의 승화작용을 시도하면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시집 <허무집>의 제목이 말해주듯 그의 시는 짙은 허무의 그림자로 싸여있다. 그 허무는 무속(巫俗)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인식 및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 개성 있는 여성적 발상에 의해 자기가 좋아하는 시어(詩語)들을 여성적 운율에 담아 노래한다. 예를 들어, 사랑의 불교적 윤회(輪廻)에 대한 직감을 보여주는 <우리가 물이 되어>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풀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들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시집 <허무집(1971)-

 

 다만, 어휘나 발상이 선험적(先驗的) 느낌을 주지 않도록 구체적인 경험(내적ㆍ외적)에 의해 육화(肉化)시키는 일이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의 시세계는 존재 탐구의 문제에서 사회 역사적 삶의 문제로 초점을 바꾸고 있다. 제1시집 <허무집>(1971)은 인간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인간의 감정이 거의 배제), 시선집 <풀잎>(1974) 이후 관념적, 개인적 차원에서 현실적, 공동체적 삶으로 관심을 바꾸었다.

 

 

순례자(巡禮者)의 잠

 

바람은 늘 떠나고 있네.

잘 빗질된 무기(無機)의 구름떼를 이끌면서

남은 살결은 꽃물든 마차에 싣고

집 앞 벌판에 무성한

내 그림자도 거두며 가네.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은 아침

싸움이 끝난 사람들의 어깨 위로

하루 낮만 내리는 비

낙과(落果)처럼 지구는 숲 너머 출렁이고

오래 닦인 초침 하나가

궁륭(穹隆) 밖으로

장미가시를 끌고 떨어진다.

 

들여다보면 안개 속을

문은 어디서 열리고 있는가.

생전에 박아두었던

곤한 하늘 뿌리를 뽑아들고

폐허의 햇빛 아래 전신을 말리고 있는

눈먼 얼굴들이여

 

떨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잠이 들면

이제 알았으리, 바람 속에서

사람의 손톱은 낡고

집은 자주 가벼워지는 것을

위대한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가는 아침

돌아옴이 없이 늘 날으는

바람에 실려

내 밟던 흙은 저기 지중해쯤에서

또 어떤 꽃의 목숨을 빚고 있네.

 

 -시집 <허무집(1971)-

 

 

 위의 시 <순례자의 잠>을 읽어보면 세련된 수사와 깔끔한 구성력 및 절제된 시어의 구사가 한껏 돋보인다. 시인은 그 당시 여류 시인들이 보여 주고 있던 폭이 좁은 진부한 주제의식과 소박한 서정의 한계를 뛰어넘는 심도 있고 참신한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아직 삶의 연륜이 짧은 그가 사물과 삶에 대한 인식이 심화될 수 있었던 계기의 하나가 뇌종양의 병고에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허무주의는 그의 초기시에 있어서 창작 방법상의 주요한 모티브로 자리 잡고 있다. 허무의식을 통해 삶과 죽음의 심연을 파헤치려는 시각에서 씌어진 그의 시는 단순한 느낌의 자세에서 읽혀지기를 허락하지 않고,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자세를 독자들에게 요구한다. 그가 대학 시절을 보낸 1960년대 후반은 4ㆍ19와 5ㆍ16을 거쳐 월남파병, 그리고 장기집권을 위한 이른바 근대화정책이 졸속정책으로 진행되면서 독재적 정치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부조리한 사회 현상이 팽만해지고 진정한 인간다움의 삶이 극도로 소외되어가던 시기였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억압된 외부적인 사회현실의 상황 속에 젊은 시절 그의 허무주의는 올바른 삶을 지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현실 대응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허무집>(칠십년대동인회.1971)-

 

  시인 신경림은 강은교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강은교, 그는 마력의 시인이요 주술의 시인이다. 강은교에게 있어 허무는 윤회사상으로 발전하고, 윤회사상에 기초한 그의 시는 어느새 주술적 가락을 따게 된다. 구체적 삶의 형상화 속에 문득 죽음의 예감을 삽입시키기도 하고, 죽음의 음각 위에 사랑의 환희를 영사(映寫)시키기도 한다. 이 주술적 가락 속에서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언어들, 예컨대 뼈, 살, 물, 모래 등은 해체된 삶의 무의미한 모습, 삶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허무의 실상, 의지와는 무관하게 형성, 진행되는 인간의 운명 등을 각각 상징함으로써 그의 시 자체를 영매적(靈媒的), 주술적인 것으로까지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