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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정지용(鄭芝溶) 두 번째 시집 『백록담(白鹿潭)』

by 언덕에서 2013. 5. 20.

 

 

 

 

정지용(鄭芝溶) 두 번째 시집 백록담(白鹿潭)

 

 

 

 

 정지용(鄭芝溶)의 두 번째 시집. B6판. 136면. 1941년 [문장사(文章社)]에서 간행하였고, 1946년 백양당(白楊堂)에서 다시 나왔다. 모두 5부로 되어 있으며 1∼4부에 25편의 시와 5부에 8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1부는 <장수산(長壽山) 1><백록담><비로봉(毘盧峰)> 등 18편, 2부는 <선취(船醉)><유선애상(流線哀傷)>의 2편, 3부는 <춘설(春雪)><소곡(小曲)>의 2편, 4부는 <파라솔><슬픈 우상><별>의 3편, 그리고 5부는 <노인과 꽃><꾀꼬리와 국화> 등 산문시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춘설(春雪)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어름 글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롬 절로

향긔롭어라.

 

웅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끔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꽃 피기전 철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 [문장] 3호(1939. 4) -

 

 

 <정지용시집>이 도시나 바다를 공간적 배경으로 선택하고 있는 데 비하여 1부에서는 거의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산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에 머물지 않고 금욕이나 극기의 정신적 특질을 내포한다. 2부의 작품들은 정지용 시의 전기적 풍모를 띤다. <정지용시집>에도 <선취>라는 시가 있지만 제목만 같을 뿐 내용은 다르다.

 

 

정지용 시인의 글, 정종여 화가의 수묵화가 함께 만들어낸 시화(詩畵). /국립현대미술관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山)새 걸음걸이.

 

여울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 [문장] 22호(1941. 1) -

 

 

 3부의 작품은 모두 2행 1연의 형식으로서 한시적(漢詩的) 형태를 취하고 있고, 4부의 작품들은 종교 시편에 가깝다. 5부의 작품들 중 <노인과 꽃><꾀꼬리와 국화>의 2편은 시적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 2편의 산문은 뒤에 <지용시선>에 재록된 것으로 보아 시인 자신은 산문시로 간주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으나 지용의 산문 또는 산문체 시에 대해서는 국문학계에서는 향후 논의의 여지가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백록담(白鹿潭)>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白樺)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白樺)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송아지는 움매―움매―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솨―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넌출 기어간 흰 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용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 식물을 새기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촐한 물을 그리어 산맥 위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이겨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백록담>(문장사,1941)-

 

 

 시집 <백록담>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백록담>이다. ‘한라산소묘’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원래 1939년 [문장] 3호에 처음 발표된 것이다. 한라산 정상의 화구호(火口湖)라고 하는 지상적 차원에서 최정상의 높이를 의미함과 동시에 우리 현대시의 가장 최고의 높이를 의미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위의 시 '백록담'은 정확한 산문의 형식을 취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율조와 심상(心像)으로 정확하기가 비할 바 없는 시적 효과를 획득하고 있다. 화구호는 ‘하늘’과 같은 의미가 되면서 ‘나의 얼골’과 맞닿아 있는데 ‘나’의 기진(氣盡)ㆍ희생ㆍ고독ㆍ연민ㆍ고통ㆍ수난ㆍ도취를 통하여 기도조차 망각하는 몰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 화구호는 이제 더 이상 ‘산’과 ‘하늘’이 따로 분리될 수 없으며, 백록담과 순례자가 객체와 주체로 대립될 수 없는 궁극에 자리잡게 된다. 우주와 인간, 세계와 자아의 접합을 이 작품만큼 형상화한 것은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