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시집 감상

노향림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by 언덕에서 2013. 4. 29.

 

 

 

노향림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여류시인 노향림(盧香林.1942.4.2∼ )이 1998년에 펴낸 이 시집은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의 실존성을 회복하려는 남다른 언어적 과정을 통해 현실적 삶의 무의미성과 불모성을 형상화해 보여준다. 노향림은 절제된 감정을 깔끔하고 선명한 이미지와 생생한 정황묘사를 통해 표현하는 시인으로 이 시집에는 불빛 반짝이는 오피스텔과 옥상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산동네 골목길이 우리 삶의 대조적인 모습을 연상 시키는 <산천동>을 비롯해 <빗방울 전주곡>,<태백에 가다>,<내 마음의 벌판>,<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바람 부는 날> 등의 창작시가 들어있다.


추억이 마려운 얼굴


고속도로 휴게소 간이식당에서

찐 감자 몇봉지를 사들고

그는

추억이 마려운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하늘은 눈을 찌를 듯 높고

타고 온 트럭은 등 돌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잠시 벗어 걸어두고

마구잡이로

시간은 그렇게

사람들의 뒷덜미를 끌고

들어갔다

나옵니다.


하릴없이 등 돌려 남겨두고 온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찌르레기새처럼 박혀 있고

깡마른 얼굴로

노을이 중얼거립니다.


여기서 늙음까지는 몇리?


-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창비 1998)



 이 시집에서 나타나는 시인의 색깔은 선명하고 밝다.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펄럭이는 하얀 옥양목의 이미지가 있다. 절제된 감정과 잘 다듬어진 언어는 그의 시를 빛낸다. 훌쩍 떠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한다. 노향림은 이 시집으로 제3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했다.


어떤 개인 날

 

낡고 외진 첨탑 끝에 빨래가

위험하게 널려 있다.

그곳에도 누가 살고 있는지

깨끗한 햇빛 두어 벌이

집게에 걸려 펄럭인다.

슬픔이 한껏 숨어 있는지

하얀 옥양목 같은 하늘을

더욱 팽팽하게 늘인다.

주교단 회의가 없는 날이면

텅 빈 돌계단 위에 야윈 고무나무들이

무릎 꿇고 황공한 듯 두 손을 모은다.

바람이 간혹 불어오고

내 등 뒤로 비수처럼 들이댄

무섭도록 짙푸른 하늘.


-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창비 1998)


 이 시집에서 보여지는 작품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도시와 교외의 정경이 많이 묘사된다. 꽃과 화분 등이 시인의 정서 표현에 많이 등장하며 공간적 인식을 시간과 연결하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서쪽하늘에 오후가 밀려있다’는 아름다운 표현이 시집 곳곳에 숨어있다.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바닷바람 속에는

치아가 누렇게 삭은 작은 꽃이

웃지 않는다.

얼굴 가린 채

흔들린다.

당산나무에는 무감각과 짚꾸러미

지폐 몇닢이

옛날 옛적처럼

묶였다.

목욕재계하고 술잔 올리듯

몇구의

죽음이 엎드려 있다.

후투티새가 오지 않는 압해도였다.


-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창비 1998)



 노향림의 시는 외따롭고, 아득하고, 희미하게 번져가는 풍정들에 대한 하염없는 연민과 동경으로부터 나온다. 문체와 신체가 따로 놀지 않고 서로를 향해 파고들며 환하게 욱신거리는 말들! 점자를 짚듯 한 자 한 자 체온을 얹어보고 싶다.(손택수 시인)


강변 끝엔 포장마차가 있다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낮게 쭈그려 앉았다.

서로 숨죽여 둥글게 이마 맞추고 앉았다.

포장마차 몇 채.


좌판 위에 포개어놓은 헌 누더기 같은 마음

찬물로 고루 헹구고 나면

싱싱한 바람소리 몇토막 쳐서

굽는지 매운내들 자욱하다.


귀퉁이에는 싸구려 희망이

상하지 않게 투명랩에 덧씌워

숨 끊어져 있고


설설 끓는 일상 속에서

따끈한 위안을 퍼서 후루룩 마신다.


뜨내기 김씨와 이씨가 만취의 나라에서

노여움과 노닥거리는 동안

식은 욕망들 씻어 엎는 소리.


성미 급한 불빛들이

차도 아래까지 몇됫박씩 내려와

눈 깜박이며 숨어 있다.

겨울이 깊다.


-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창비 1998)

 

 

 

 

 

 노향림(1942 ~  )은 전남 해남 출생으로 정신여고를 거쳐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월간문학]에 <불빛의 새><불> 등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한국시] 동인으로 대한민국문학상(1987), 한국시협상(1999), 이수문학상(2002), 자랑스러운 중앙인상(2005) 등을 수상했다. 【시집】<K읍 기행(紀行)>(현대문학,1977), <연습기(練習機)를 띄우고>(연희출판사,1980), <눈이 오지 않는 나라>(문학사상사, 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문학사상사.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창비.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창비.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