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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이해인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by 언덕에서 2013. 5. 27.

 

 

 

이해인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민들레의 영토>(카톨릭출판.1976) <내 영혼에 불을 놓아>(분도출판.1979)에 이어 1979년에 펴낸 이해인 수녀의 제3시집으로서 5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 '가을편지' 2부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 장편시 3부 '꽃 이야기',4부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단편시로서 꽃, 종소리, 빨래, 봄 편지 등 소박한 소재들을 통한 시들이다. 5부 '은혜의 빛 둘레에서' - 기도시들로서 여러곳에 실었던 것을 모았다. 이 시들은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접한 사소한 것도 영원에 연결하려는 끊임없는 지향과 노력과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라일락 

 

바람불면

보고 싶은

그리운 얼굴

 

빗장 걸었던 꽃문 열고

밀어내는 향기

 

보랏빛, 흰빛

나비들로 흩어지네

 

어지러운 나의 봄이

라일락 속에 숨어 운다

무늬 고운 시로 날아다니네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

 

 1950년 6ㆍ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해인 수녀의 아버지가 납북 되었고,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때는 부산성남초등학교에 다녔고, 서울이 수복된 후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창경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당시에 이해인의 언니가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수녀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58년에는 풍문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무렵에 시 <들국화>가 쓰여졌다. 이후 1961년에는 성의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1964년에 올리베타노의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세례명은 클라우디아이다. 입회한 이후부터 '해인'이라는 필명으로 가톨릭에서 발간하는 [소년]지에 작품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1968년에 수도자로 살 것을 서원한 후,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경리과 보조 일을 하였다.

 이후 필리핀에 있는 성 루이스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종교학을 공부하였다. 귀국한 후 1976년에 첫 시집인 <민들레의 영토>를 발간하였다.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타 종교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으며, <시경에 나타난 복(福) 사상 연구>라는 논문을 집필했다.

 1992년에 수녀회 총비서직을 맡게 되었다. 비서직이 끝난 1997년에 '해인글방'을 열어두고 문서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부산 가톨릭대학교의 교수로 지산교정에서 '생활 속의 시와 영성' 강의를 하였다.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손 시린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 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엔 바람이 차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와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

 

 수녀 시인 이해인의 작품 문체는 독자가 몰래 엿듣는 듯한 내밀한 독백체, 고백체이다. 이 작품도 그러한 특징을 지닌다.

 이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어는 '반달'이다. 이 반달은 '오늘'이라는 현실 상황 속에서는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보름달처럼 완전하고도 충만된 '내일'의 삶을 꿈꾸게 된다. '반달'이라는 현재의 결핍 상황은 일상적인 굶주림과 불완전성을 뜻한다. 따라서 오늘은 내가 비록 보름달이 아닌 반달로 남아 있지만, 언젠가는 보름달과 같이 맑고 높이 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처음으로

사랑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하늘색 원피스의

언니처럼 다정한

웃음을 파도치고 있었네

 

더 커서

슬픔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실연당한

오빠처럼 시퍼런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네

 

어느 날

이별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남빛 치마폭의 엄마처럼

너그러운 가슴을 열어 주었네

 

그리고 마침내

기도를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파도를 튕기는 은어처럼

펄펄 살아 뛰는

하느님 얼굴이었네 !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

 

 이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우리가 왜 시를 찾고 시를 읽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해인 수녀는 지상의 모든 대상들과 기도 안에서 만나고, 편지로서 만나고, 그리움으로서 만난다. 그리하기에 수녀의 시는 기도로서, 편지로서, 그리움으로서 다가온다. “뒤틀린 언어로 뒤틀린 세계를 노래”한 시들이 줄 수 없는 “위안, 기쁨, 휴식, 평화”를 주기에 종파를 초월하여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어느 아침

 

밤새 깔린

어둠의 부스러기들을

행주로 닦아 내고

 

정결한 식탁에

희망을 차린다

 

그릇이 부딪칠 때마다

가슴에도 달가락거리는

그 웃음소리

 

마주 앉은 가족의 눈 속에서

사랑의 언어를 꺼내

양식을 삼는

어느 아침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

 

 또한 이해인 수녀는 악기의 소리로 시를 쓴다. 우리가 불안해하지 않고,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감동과 전율로 그녀의 시를 읽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리듬에는 “사기(邪氣)”도 “불화”도 없다. 오묘한 화성의 조화, 부드럽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하다. “평생을 죄지은 자, 상처받은 자들을 감싸 안아 성모 마리아의 마음으로 사랑해온 수녀님의 순결한 영성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소리다. 그리하여 수녀의 글을 받는 이들은 “행복하다.”

 

 

 

 

 

은혜의 빛 둘레에서

 

주여 우리 오늘 이마를 마주 대고

은혜의 촛불을 밝혀 둡니다.

 

소리없이 익어가는 열매처럼 겸허한 마음 모아

그 빛의 둘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소리 내어 외쳐 버리기엔

너무나 은혜로운 50년의 이야기

오늘을 있게 한 어제의 이야기

 

마음 깊이 새겨져 밝혀 든 촛불 위에

새 옷을 입고 펄럭이는

고마움, 놀라움, 새로움의 빛이여

 

갈수록 사무치는 당신의 사랑 앞에

우리는 갈수록 할 말이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으로

연약한 심지를 돋구며 견디었던 나날

 

불러 주신 이 땅에서

뜨겁게 당신을 닮고 싶었습니다.

 

아직도 원하시는 만큼은

빛과 향기가 되지 못한 부끄러움 그대로 안고

 

소중한 형제들과 함께

서투른 노래나마 정성껏 부르며

빛의 외길로 치닫게 하소서

 

주여 우리가 살아오면서

당신과 이웃에게 진

엄청난 사랑의 빚 또한

당신의 사랑으로밖엔

갚을 도리가 없음을 고백하는 오늘

 

진정 소리 내어 외칠 것은

당신의 크신 은혜뿐

 

말보다 깊은 기도로 당신을 기리는

봉헌의 촛불이게 하소서

그 빛 둘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 1981년 9월 14일 올리베따노 베네딕도 수녀회 한국 진출 50주년에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

 

 

 "제대로 옷을 못 입어 볼품없어 보이고, 써도 써도 끝까지 부끄러운 나의 시는 나를 닮아 언제나 혼자서 사는 게지. 맨몸으로 펄럭이는 제단 위의 촛불 같은 나의 언어, 나의 제물.('내 혼에 불을 놓아'에서)"

 이렇게 외로이 혼자 읊조리는 언어라고 하는데 <민들레의 영토>가 가톨릭 출판사에서 19판, <내 혼에 불을 놓아><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가 분도 출판사에서 각각 15판을 발행해 세 가지 시집이 도합 40만 부나 팔렸다고 한다.(가톨릭 신문.1986년 1월19일자 보도) 이 기록은 아마도 우리나라 시집 출판 사상 단기간을 기준으로 따지면 가장 많은 발행 기록일지도 모른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박두진 시인은 <민들레의 영토> 머리말에서 '시인이 되기 위한 시로서가 아니고, 시인으로서의 시가 아닌 데에 그의 시의 일단의 순수성과 그 동기의 초월성이 있다'고 했다. 홍윤숙 시인은 <내 혼에 불올 놓아> 머리말에서 '대패질도 기름칠도 하지 않은 마구 깎아 낸 원목(原木) 같은 생명감'이라고 했다. 구상 씨는 '그녀의 영글어 가는 영혼의 모습이 너무도 장하고 아름다워서 눈시울을 적신다. 산속의 샘물 같은 그녀의 시편들이 고갈되고 혼탁한 오늘의 우리의 영혼을 축여 주고 씻어 주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기를 합장한다'고 했다.(구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