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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박인환 시집 『목마와 숙녀』

by 언덕에서 2013. 4. 15.

 

 

 

박인환 시집 『목마와 숙녀』

 

 

 

 

 

 

 

박인환(朴寅煥)의 시집. A5판. 194면. 1976년 [근역서재(槿域書齋)]에서 간행하였다. 박인환의 2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아들 세형(世馨)이 묶어낸 이 시집에는 시인 생존시의 첫 시집인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1955)에 수록된 시 56편 중 54편과 유작 등 미수록 시 7편 등 모두 61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집 표제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목마와 숙녀>를 취하였다.  

 

 시집 구성은 지은이 사진, 약력, 목차, 본시, 후기의 순서로 짜여져 있다. 그 내용은 다시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목마와 숙녀’ 장에 <최후의 회화(會話)> 등 26편, ‘아메리카 시초(詩抄)’에 <태평양에서> 등 12편, ‘영원한 서장’에 <어린 딸에게> 등 12편, 그리고 ‘사랑의 Parabola’ 장에 <세월이 가면> 등 11편이 수록되어 있다.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을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이름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시집 <박인환 시선집>(1955)- 

  

 

 

 박인환은 강원도 인제 출신으로 아버지 광선(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ㆍ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8.15 광복 후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ㆍ이한직(李漢稷)ㆍ김수영(金洙暎)ㆍ김경린(金璟麟)ㆍ오장환(吳章煥)ㆍ김기림(金起林)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김병욱(金秉旭)ㆍ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ㆍ김규동(金奎東)ㆍ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시선집>(1955)-

 

 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9년 김수영ㆍ김경린ㆍ양병식(梁秉植)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밤의 미매장(未埋藏)><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30세로 요절하였다.

 

 

최후의 會話 

 

 

아무 잡음도 없이 멸망하는

도시의 그림자

무수한 印象과

轉換하는 年代의 그늘에서

아 영원히 흘러가는 것

신문지의 傾斜에 얽혀진

그러한 불안의 격투.

 

함부로 개최되는 酒場의 謝肉祭

흑인의 트럼펫

구라파 新婦의 悲鳴

정신의 황제!

내 비밀을 누가 압니까?

체험만이 늘고

실내는 잔잔한 이러한

幻影의 침대에서.

 

회상의 起源

오욕의 도시

황혼의 망명객

검은 외투에 목을 굽히면

들려오는 것

아 영원히 듣기 싫은 것

쉬어빠진 진혼가

오늘의 폐허에서

우리는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一九五○年의 사절단.

 

병든 배경의 바다에

국화가 피었다

폐쇄된 대학의 정원은

지금은 묘지

繪畵와 理性의 뒤에 오는 것

술 취한 水夫의 팔목에 끼어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안한 최후의 會話 .

 

-<박인환시선집>(1955)-

 

 

 그의 시는 자신이, “나는 십여 년 동안 시를 써왔다. 이 세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기묘한 불안정한 연대였다.” (<박인환선시집> 후기) 라고 술회한 것처럼 해방공간으로부터 6·25 및 전후의 혼돈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좌절과 허무의 시대를 살아가는 도시 청년의 비극적 현실 인식 및 모더니즘풍의 감각과 시어로서 형상화된 특징을 지닌다.

 위의 시에서 보듯이, 도시문명과 그 그늘에 대한 감각적 인상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박인환의 도시와 문명에 대한 모더니즘적인 추구는 시대상황적인 회의와 절망으로 밝은 면보다는 우울과 감상 등 어두운 면에 치우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청록파 등 전원적인 서정이 주조를 이루던 1950년대에 도시적 서정을 탐구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검은 강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후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者)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情慾)처럼 피폐한 소설(小說)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과 초연(硝煙)이 가득 찬

생과 사의 경지에 떠난다.

 

달은 정막(靜寞)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룬

자유의 성채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박인환 시선집>(1955)-

 

 그의 시 세계는 로맨티시즘에 전적으로 내 맡기면서도 감각은 극히 현대적이요 인생파적인 관념에 접근되어 있다. 그리고 삶의 고뇌와 모순을 이미지로 제시하기보다는 감성과 은유를 통해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이 책에 실은 그의 시들을 감미하면서 그가 추구하는 모더니즘을 이해한다면 한결 그와 가까이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

 그는 50년대의 전쟁과 비극, 퇴폐와 무질서, 불안 등 시대적 고뇌를 신선하고 리듬 있는 언어로 노래하였다. 좌절과 허무의 시대를 살아가는 도시 청년의 비극적 현실인식 및 모더니즘풍의 표현은 그의 역량을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