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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by 언덕에서 2013. 4. 1.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시인 허수경(許秀卿, 1964 ~)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92년 독일로 가서 현재 뮌스터대학에서 고대동방문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1987 『실천문학』에 「땡볕」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했으며, 방송국에서「FM밤의 디스크쇼」 스크립터도 활동했다.

 작품으로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장편소설 『모래도시》, 수필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모래도시를 찾아서』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끝없는 이야기』, 『슬픈 란돌린』 등이 있다.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 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 지성사)

 

 1992년 발표한 시집『혼자 가는 먼 집』에서 시인은 독특한 창의 가락으로, 세상 한편에 들꽃처럼 피어 있는 누추하고 쓸쓸한 마음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마음 시편들은 사라져가고 버림받고 외롭고 죽어 있는 모든 마음들을 따뜻한 모성의 육체로 애무하고 품는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긁히고 갈라지고 부러진 남성성을 탁월한 여성성의 이미지로 잉태해내고 있다.

 

기차는 간다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 지성사)

 

 

 

 

 허수경은 세상사의 많은 슬픔과 비애들을 다양한 음역을 가진 시로 표출해온 작가다. 1964년 경남 진주 출생. 시인이자 고고학자인 허수경은 스물다섯 나이에 세상을 통달한 듯한 시어로 80년대 시대가 할퀸 인간들의 삶을 담은 첫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로 시인으로 등단했다. 

 

봄날은 간다

 

 사카린 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박분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 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 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살릴 때까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 지성사)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다 어느 날 독일로 떠나 뮌스터 대학에서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방학 동안에는 발굴 현장 땡볕 아래서 유적지를 탐사하고, 학기 중에는 집에서 도서관에서 고대 동방 고고학을 연구했다. 그러다가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게 차오를 때면 램프를 밝히고 단정하게 책상에 앉아 모국어로 글을 썼다고 한다.

 

 

 

공터의 사랑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 지성사)

 

 

 허수경은 한국과 독일, 그리고 옛 페르시아를 지칭하는 근동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 넘나듦 속에서 모국어인 한국어에 독일어와 ‘쐐기문자’로 상징되는 고대 근동어가 끊임없이 틈입하는 혼종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즘 고고학은 왕들의 금테 두른 유적보다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토기의 파편, 말하자면 이름 없이 사라져간 이들의 역사를 발굴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한다. 이에 비춰, 허수경은 모래 속에 파묻힌 폐허의 흔적에 귀와 입을 내주며 공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