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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레이몽 라디게 장편소설 『육체의 악마(Le Diable au corps)』

by 언덕에서 2013. 6. 4.

 

레이몽 라디게 장편소설 『육체의 악마(Le Diable au corps)』

 

 

 

프랑스 소설가 레이몽 라디게(Raymond Radiguet, 1903 ~ 1923)의 장편소설로 1921년 발표되었다. 이 소설은 16세 고등학생이 19세 유부녀와 사귀는 불륜의 사랑 이야기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어정쩡한 경계에서 벌어지는 연애사건은, 거기에 벌써 모순되는 두 가지 요소를 내포한다. 빨리 어른의 세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의 조급함과 현실적으로 어린 나이에서 오는 무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조급함과 무경험은 미성년기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인생이란 이 두 가지가 서로 지속적으로 혼합하고 간섭하며 상호작용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한 인간의 성숙이란 미숙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을 의미하진 않는다. 바보와 현자 사이에 끝없이 벌어지는 논쟁과 대화가, 때때로 바보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어쩌면 인생의 참모습과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1919년 작자가 16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6세 고등학생과 19세 유부녀의 연애사건을 그렸다. 시인 장 콕토의 애인이기도 했던 라디게는, 스무 살에 발표한 이 작품으로 [르 누보 몽드 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12월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전쟁이라는 이상한 분위기 속의 이 청춘 이야기는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데, 작자는 결코 자기 변호를 하려들지 않고 소년에서 청년이 되려는 과도기의 영혼을 냉엄한 눈으로 응시하고 가차없는 분석을 나타내고 있다. 작가 라디게의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1946년 프랑스의 클로드 오탕 랄라 감독의 연출로 영화화되었다.

 

 

영화 [육체의 악마], 1946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16세의 고교생 프랑수아와 19세의 유부녀 마르트와의 사랑하는 사이다. 주인공인 나는 부모와 잘 알고 지내는 이웃마을 그랑지에댁과의 만남에서 그랑지에씨 딸 마르트를 알게 된다. 그때 내 나이는 16세, 그녀의 나이는 18세로 연상의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가 약혼을 했고, 약혼자인 자크는 전쟁터에 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저으기 실망했으나 곧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어느 날 아침 바스티유 역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결혼 준비를 위해서 장을 보러 가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 혼수를 구입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그때부터 나와 마르트 사이의 이상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세계1차대전 중이라 군인이었던 자크는 결혼 후 곧 전선으로 떠나갔다. 나는 마르트가 사는 신혼집에 자주 놀러갔고, 그녀의 집을 방문한 지 넉 달이 지난 어느 비오는 날, 서로 육체 관계를 갖게 된다. 그 후로 우리들은 가족들을 속여가며 거의 매일 그녀의 침대에서 육체를 불살랐다. 둘은 더 이상 떨어져 살 수 없을 만큼 깊은 관계가 되었다.

 한편, 휴가차 귀향한 자크는 사랑을 돌이키려고 애를 쓰나 쌀쌀하게만 대하는 마르트의 행동에 대해서 그 이유를 끝내 알지 못한 채 힘없이 전선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7월 어느 날, 마르트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는데 임신을 했다면, 이 일은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마르트에게 남편과 접촉하라는 말을 했고, 이에 대해 마르트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뒷날에야 알게 되었지만, 실은 마르트가 자크의 휴가 기간 때 이미 잠자리를 함께 했던 것이다.

 마르트와 나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호텔이 보일 때마다 핑계를 내세우면서 피하였다. 덜덜 떨면서 오랫동안 밤거리를 돌아다닌 탓으로 마르트는 감기가 들었고, 병세가 악화되면서 3월 출산 예정이었던 아이가 두 달 먼저 태어났다. 마르트는 그 아이에게 내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녀에게서 그 아이는 분명 내 아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마르트는 산후 점차 몸이 쇠약해져 갔고, 어느 날 돌연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고 했다. 그녀는 바로 내 이름을 부르며 죽어간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레이몽 라디게(Raymond Radiguet, 1903 ~ 1923)

 

 

 

「육체의 악마」는 프랑스가 낳은 천재 작가 라디게가 16세에서 18세 사이에 쓴 작품으로, 그 제재나 등장인물의 행위는 열예닐곱 살 된 소년의 작품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남녀간의 애정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남녀의 부정(不貞)을 다루고 있지만, 주된 요소는 그 줄거리보다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 구조와 마르트 나름대로 사랑을 구축해 가는 과정, 그리고 범속한 고정관념을 벗어나 작가의 모럴리스트적인 성찰에 있다. 그런 점에서 라디게는 라파이에르 부인, 스탕달 등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심리소설의 맥을 계승하고 있으며, 17세기와 18세기 모럴리스트들의 정통적 흐름의 중간에 위치한다.

 장 콕토에 의하면 이 작품은 라디게 자신이 14세 때 ‘아리스’라는 10년 연상의 여인과 나눈 사랑을 주된 제재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작가는 이를 부정하고 있는데, 어쨌든 짧은 문학 수업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뛰어난 작품을 쓴 그의 작가로서의 천부적 재능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둔 열아홉 살의 마르트. 유난히 아들에게 엄격하지 않은 아버지를 둔 열여섯 살 소년 프랑수아에게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십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지나친 자유가 부여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을 향해 치닫는다. 소설은 철저히 심리적 관찰에 초점을 맞춘다.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소유욕과 지배욕, 도피 욕구, 그리고 믿음과 의심이라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묘사한 대목은 정확하고 날카롭게 핵심을 찌른다.

 

 

 1903년 프랑스 생모르에서 태어난 라디게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에 있는 장서 읽기에 골몰하다 1918년 문예지에 콩트를 싣고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장 콕토와 친분을 맺고 함께 <르 코크>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육체의 악마』의 여주인공 마르트의 모델이기도 한 이웃의 젊은 유부녀 알리스 세리예와 만나는 등, 다섯 정부를 두었으며 술집과 호텔을 전전하는 등 정숙하지 못한 생활을 하였으나 그의 정신만은 한결같이 투명하고 논리적이었다고 평가된다. 1921년 희곡 <펠리캉네 집 사람들>이 출간되고, 이어 파리에서 떨어진 피케에서 『육체의 악마』를 완성했다. 1922년에는 소설 <도르젤 백작의 무도회>를 집필했다. 1923년 그라세에서 『육체의 악마』가 출간되자 막스 자코브, 폴 발레리 등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으나 10월 파리로 돌아온 후, 장티푸스에 걸려 짧지만 천재적이었던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독자는 이 작품이 창작된 약 100년 전의 시대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의미가 가벼워 보이지 않는 것은  한 세기 전의 작품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나날이 그 의미가 점차 가벼워지는 남녀 간의 사랑의 의미 때문일 것이다. 사랑, 그 진정한 의미와 책임, 실천의 의미는 무엇일까.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통속적으로 다룬 책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사랑의 열정 안에 갇힌 세계에서 오로지 심리적 관찰에 초점을 맞추고, 사랑의 감정과 욕망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는 소설은 드물다. 이 소설은 육체적 사랑에 빠진 남자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놀라울 만큼 잘 그려내고 있다. 남자의 연애심리, 즉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소유욕과 지배욕, 도피 욕구, 그리고 믿음과 의심이라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묘사한 대목은 정확하고 날카롭게 핵심을 찌른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 『육체의 악마』는 여전히 현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