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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조지훈 첫 시집 『풀잎단장』

by 언덕에서 2013. 12. 9.

 

 

 

 

 

조지훈 첫 시집 『풀잎단장

 

 

 

 

 

 

 

조지훈(趙芝薰)의 시집으로 A5판. 86면. 1952년 창조사(創造社)에서 간행하였다. 작자의 첫 시집으로 서문이나 발문은 없고 35편의 시가 5부로 나뉘어 수록되었다.

 제1부 ‘절정(絶頂)’에는 「아침」ㆍ「산길」ㆍ「풀밭에서」ㆍ「그리움」ㆍ「절정」 등 7편,

 제2부 ‘창(窓)’에는 「밤」ㆍ「창」ㆍ「풀잎단장」ㆍ「암혈의 노래」 등 7편,

 제3부 ‘고사(古寺)’에는 「마을」ㆍ「산」ㆍ「고사」ㆍ「산방(山房)」ㆍ「달밤」 등 7편이 실려 있다.

 제4부 ‘파초우(芭蕉雨)’에는 「낙화(落花)」ㆍ「파초우」ㆍ「고목(枯木)」ㆍ「완화삼(玩花衫)」 등 7편,

 제5부 ‘석문(石門)’에는 「봉황수(鳳凰愁)」ㆍ「고풍의상(古風衣裳)」ㆍ「승무(僧舞)」ㆍ「석문」 등 7편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낙화(落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상아탑 5호> (1946. 4)

 

 이 시집에는 『청록집(靑鹿集)』에 실렸던 작품이 전부 재수록 되어 있고, 대부분의 시편들이 8ㆍ15광복 전에 쓰인 것들이며, 광복 후의 작품은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시집에 나타나 있는 조지훈의 시적 특질은 『청록집』의 작품 경향과 거의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동양적 자연 친화(自然親和)의 사상과 불교적 선감각(禪感覺) 및 고전적 미의식을 단아한 언어와 리듬으로 표현하고 있다. 저자는 이 시집 이후 역사의식이 강하게 투영된 일련의 시를 썼고, 또 광복 전에는 서구의 탐미주의적 영향이 짙은 시를 실험하기도 하였다.

 

승무(僧舞)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뚜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문장] 11호(1939년 12월호) -

 

 

 

 그러나 그처럼 다양한 모색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의 작품들이 구현하고 있는 특질은 저자의 시세계의 본령이 되고 있다. 이 시집을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승무」를 들 수 있는데, 이 시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하여 승무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점점 고양되어 가는 정조를 전아한 음조로 노래하고 있다.

 또한 “부처님은 말없이/웃으시는데//서역만리(西域萬里)길/눈부신 노을 아래//모란이 진다.”로 맺어지는 「고사」는 불교적 선감각을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밖에 「파초우」는 자연친화 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무사(思無邪)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체로 이 시집의 작품들은 고전적인 한유(閑悠)의 미와 불교적 세계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풀잎 단장(斷章)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히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 시집 <풀잎단장>(창조사.1952) -

 

 

 조지훈의 첫 시집인 <풀잎 단장>의 표제시인 위 시는 풀잎에 대한 미시적 관조로써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노래한 7행의 자유시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풀잎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풀잎과 같은 연약한 존재이면서 한편으로 이 넓은 세상 안에 태어나 조그만 바람결에도 흔들리며(번뇌하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살아간다. 즉 풀잎의 모습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새로이 발견한다.

 

석문(石門)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시집 <풀잎단장>(1952)-

 

 

 조지훈은 일반적으로 회고적(懷古的) 취미, 자연적 친화성(親和性), 불교적 선감각(禪感覺)을 그 주요 바탕으로 삼고 있다. 어렸을 때 한문을 익힌 까닭에 일찍부터 당시(唐詩)에 친숙했었고, 유교적 가정에서 자라 장자(長者)의 기풍을 갖추었으며, 불교세계에 대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주어서, 이러한 요소들이 작품에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조지훈은 시의 생명을 무엇보다도 미세계(美世界)에서 추구했으며,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이론을 통해서도 이것을 주장했다. 그는  한시가(漢詩家)나 시조시인과 같은 전통적인 시감각으로 동양적ㆍ고전적 시세계를 노래하여 십대 소년기에 이미 대가(大家)의 위치에 올랐으나, 끝내 이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여러 번 실험적인 시작(詩作)을 시도한 적은 있으나, 늘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미세계(美世界)의 영역으로 돌아왔으며, 우수한 작품들은 다 이 계열에 속하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