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처럼
고1 때의 일이다. 3월 말의 봄날,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영어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반 아이들 중에서 유달리 말이 많아 '촉새'라고 불리던 친구가 있었다.
촉새는 되샛과의 새(鳥)로 '언행이 가볍거나 방정맞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쓸데 없이 떠드는 이 친구 때문에 교실은 일순간 웃음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그해에는 '제비처럼'이라는 노래가 대유행이었다. 70년대를 대표하는 패션모델 출신의 가수가 부른 불후의 히트곡 '제비처럼'은 봄소식이 들린다 싶으면 각 방송국에서 지금도 가장 먼저 소개하는 봄 노래다. 경쾌한 멜로디와 약간 허스키한 묘한 목소리가 더욱 매력적이며 특히 특유의 덧니가 예뻤던 가수가 기억난다.
어쨌든 미모의 여가수가 약간의 율동을 곁들여 부르는 경쾌한 이 노래는 고교 진학을 하여 봄을 맞은 우리들의 입가에도 멈추지 않고 흘렀다.
꽃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온다고 말했지
노래하는 제비처럼
언덕에 올라보면 지저귀는 즐거운 노랫소리
꽃이 피는 봄을 알리네
그러나 당신은 소식이 없고
오늘도 언덕에 혼자 서있네
푸르른 하늘 보면 당신이 생각나서
한 마리 제비처럼 마음만 날아가네
당신은 제비처럼 반짝이는 날개를 가졌나
다시 오지 않는 님이여
가사가 대충 이랬는데 문학도임을 자처하던 나는 '빤짝이는 날개를 가졌나'라는 부분이 '상상력을 자극해서 좋다'며 함께 떠들어 대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노랫가사를 조금 바꾸어 쉬임없이 떠들어 대는 촉새를 향해 "당신은 촉새처럼 조잘대는 주둥이를 가졌나~" 하며 놀려댔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제비처럼'이라는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번져가서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그해 '제비처럼'이라는 노래는 돌풍과 같은 노래였다.
그날도 그랬다. 누가 가지고 왔는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점심시간에 틀고 있었는데 마침 ‘제비처럼’이 흘러나왔다. 반 아이들 모두가 합창을 했다. 가장 큰 목소리로 떠들던 촉새도 신이 났음은 물론이다.
이후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벨이 울려 영어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은 재단의 한 울타리에 있는 학교에서 6년간 다녔다. 영어선생님은 중학교 2, 3학년 때 영어수업을 들어봐서 내가 아주 잘 아는 선생님이셨고 유달리 나를 귀여워 해주셨다. 미군부대에서 통역관으로 일한 전력이 있는 50대의 영어선생님. 장준학 선생님……. 지적이고 근엄하신 선생님은 다정다감하셨지만 한 가지 흠은 수업시간에 껌을 씹다가 발각된 아이들에게만은 지나치게 엄격하신 점이었다. 한 번은 적발된 아이를 몽둥이로 거의 타작을 하셨다. 얼굴을 붉히시면 고함을 치셨다.
“네가 양키야? 네가 양키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미군부대에서 경험한 저급의 미국문화가 싫었거나 껌 씹는 미군들로부터 수모를 당한 트라우마가 있지는 않았을까?
아,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야겠다.
5교시 영어수업이 거의 끝났고 수업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오늘 수업 내용 중 궁금한 거 질문하도록 해라.”
이 때 한 아이가 질문을 했다.
“선생님, 수업 내용과 관계없는 걸 질문해도 됩니까?”
“영어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좋다!”
다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녀석이 질문을 했다. 점심시간에 촉새라는 녀석이 너무 많이 떠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 ‘촉새’를 영어로 뭐라고 합니까?”
갑자기 교실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선생님은 잠시 당황하시더니 곰곰 생각하신 후 이렇게 대답하셨다.
“chok~sei~~ !”
또다시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핫하, 그러니까 ‘촉’ 발음 뒤의 ‘세이’는 뒷부분 인토네이션을 위로 쭉 올리며 하는 미국식 발음이었다.
당황스런 질문에 선생님은 위기를 기지(機智)로 겨우 모면하고 교실을 나가셨다. 그러면 촉새를 영어로 하면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았다. black-facedbunting? 하하, 맞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제비처럼’ 노래 때문에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급우가 있었다. 예의‘제비처럼’이라는 노래를 부른 윤승희라는 가수가 급우의 형수였던 것이다.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기에 거의 매일 TV 방송마다 가수 윤승희가 나와서 노래 불렀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당시 유행이던 짧은 치마나 어깨가 보이는 무대 패션을 문제 삼아 급우들이 ‘너네 형수 벗은 몸을 다 봤다‘며 놀려대었던 것이다. 하하, 나는 좋기만 하던데…….
이번 겨울이 유달리 춥고 길었던 탓에 친구들을 만나면 꽃피는 봄이 빨리 오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며칠 전 졸사(猝死)라는 호를 가진 철학자(鐵學者) 친구가 내게 카카오 톡을 통해 “제비처럼”노래가 담긴 위의 동영상을 보냈다. 해당 동영상을 열어보니 작년에 지상파 방송의 7080프로에 출연한 윤승희씨가 예의 ‘제비처럼’을 부르고 있었다. 대충 계산해보더라도 환갑을 바라볼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미모와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70년대 방식의 율동이 나를 그리운 옛 시절로 초대했다. "다시 오지 않는 임이여~~." 하하, 다시 오지 않는 그리운 시절이여!
'살며 생각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춘면불각효(春眠不覺曉) (0) | 2013.04.02 |
---|---|
매화(梅花)가 만발!! (0) | 2013.03.26 |
봄날 풍경 (0) | 2013.03.15 |
평범(平凡)씨의 휴일 풍경 (0) | 2013.02.25 |
친환경 녹색운동 (0) | 2013.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