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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최영미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

by 언덕에서 2013. 3. 19.

 

 

 

최영미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는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4년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일간지 1면 6단 통광고를 내는 파격을 보이며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출간했다. 이 시집은 역시 시집으로는 이례적으로 오십만 부 이상이 팔려가며 그 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4년 발표된 이 시집은 교과서가 없는 시대에 고투하는 젊은 영혼의 편력을 도시적 감수성으로 노래하며 청춘과 운동, 사랑과 혁명 같은 이질적 요소를 구체적 삶 속에서 융합시킨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위험한 여름> 등 50여편을 묶었다.

  이 시집은 세기말의 해체주의에 이골이 난 우울한 독자들에게 하나의 잔잔한 서정적 화두이며, 희망적인 전언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저돌적인 풍자에서 한 걸음 물러 서 있다. 더구나 이 시는 대상에 대한 감정의 절제를 보이고 있다.

 1980년대가 지나가고 1990년대를 거치며 최영미는 많은 것을 회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것들이 있다. 그의 글은 변한 것을 속속들이 드러냄과 동시에 아직도 그들 세대의 마음속에 변치 않고 남아 있는 그 어떤 갈망을, 그로 인한 아픔과 우수를 어루만져 준다.

 2002년 미국에서 출간된 3인 시집 『Three Poets of Modern Korea』는 2004년 미국번역문학협회상의 최종후보로 지명되었으며, 2005년 일본에서 발간된 시선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일본 문단과 독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2006년 『돼지들에게』로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축구에세이 『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등 이색적인 저서도 출간한 바 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 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마지막 섹스의 추억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바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그런 사랑 여러번 했네

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

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

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

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

차가운 비늘을 꽂았지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몸짓

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

입안 가득 고여 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또다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불꺼진 방마다 머뭇거리며, 거울은 주름살 새로 만들고

멀리 있어도 비릿한, 냄새를 맡는다

기지개 켜는 정충들이 발아하는 새싹들의 비명

무덤가의 흙들도 어깨 들썩이고

춤추며 절뚝거리며 4월은 깨어난다


더러워도 물이라고, 한강은 아침해 맞받아 반짝이고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가 짧게 울려퍼진 다음

9시 뉴스에선 넥타이를 맨 신사들이 침통한 얼굴로 귀엣말을 나누고

청년들은 하나 둘 머리띠를 묶는다


그때였지

저 혼자 돌아다니다 지친 바람 하나

만나는 가슴마다 들쑤시며 거리는 초저녁부터 술렁였지


발기한 눈알들로 술집은 거품 일듯

부글부글 취기가 욕망으로 발효하는 시간

밤공기 더 축축해졌지

너도 나도 건배다!

딱 한잔만

그러나 아무도 끝까지 듣지 않는 노래는 겁없이 쌓이고

화장실 갔다 올 때마다 허리띠 새로 고쳐맸건만

그럴듯한 음모 하나 못 꾸민 채 낙태된 우리들의

사랑과 분노, 어디 버릴 데 없어

부추기며 삭이며 서로의 중년을 염탐하던 밤

새벽이 오기 전에 술꾼들은 제각기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택시이! 부르는 손들만 하얗게, 텅 빈 거리를 지키던 밤

4월은 비틀거리며 우리 곁을 스쳐갔다.

 

해마다 맞는 봄이건만 언제나 새로운 건

그래도 벗이여, 추억이라는 건가

 


 

 


 

 

 

인생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