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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신현림 두 번째 시집 『세기말 블루스』

by 언덕에서 2013. 3. 4.

 

 

 

 

신현림 두 번째 시집 『세기말 블루스』

 

 

 

 

 

1990년 <현대시학>에 <초록말을 타고 문득>외 9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신현림의 두 번째 시집으로 1996년 6월에 창작과 비평사에서 초판이 간행되어 시집으로는 그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시집에 실린 사진과 콜라주, 판화를 작가 자신이 직접 만들어 시와 조화시켰다.

 패기만만한 상상력에 거리낌 없이 활달한 어법이 주는 자유로움과 파격적이고 특이한 매력으로 넘치는 시집이다. 여성, 아동, 환경, 죽음, 사랑 등이 처해가는 세기말적 문제들을 노래한 이 시집은 현대의 황홀한 내면 풍경과 외로움의 미학을 보여준다. 신현림은 시적이지 않은 시어와 서경적인 표현들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의 실존성을 회복하려는 남다른 언어적 과정을 통해 현실적 삶의 무의미성과 불모성을 형상화했다.

 

꿈꾸는 누드

 

 이 남자 저 남자 아니어도

착한 목동의 손을 가진 남자와 지냈으면

그가 내 낭군이면 그를 만났으면 좋겠어

호롱불의 누드를 더듬고 핥고

회오리바람처럼 엉키고

그게 엉켜 자라는 걸 알고 싶고

섹스보다도 섹스 후의

갓 빤 빨래 같은 잠이 준비하는 새 날

새 아침을 맞으며

베란다에서 새의 노랫소리를 듣고

승강이도 벌이면서 함께 숨쉬고 일하고

당신을 만나 평화로운 양이 됐다고 고맙다고

삼십삼년을 기다렸다고 고백하겠어

 

- 시집<세기말 블루스>(창작과 비평사 1996)

 

 


 

 신현림은 독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듯한 시어로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 시인의 시에는 확실히 상처받은 여성한테는 경전(經典)과 같은 울림을 주는 요소들이 많다. 솔직한 30대 미혼 여자의 "때로는 도발적이고, 때로는 쓸쓸한" 내면고백, 시와 더불어 그가 직접 찍고 작업한 판화와 콜라지 등등. 자신의 상처를 과감하게 노출시키는 시편들이 산재해 있다.

 

너희는 시발을 아느냐

 

아, 시바알 샐러리맨만 쉬고 싶은 게 아니라구

 

내 고통의 무쏘도 쉬어야겠다구 여자로서 당당히 홀로 서기에는 참 더러운 땅이라구 이혼녀와 노처녀는 더 스트레스 받는 땅

직장 승진도 대우도 버거운 땅

어떻게 연애나 하려는 놈들 손만 버들가지처럼 건들거리지 그것도 한창때의 얘기지

같이 살 놈이 아니면 연애는 소모전이라구 남자는 유곽에 가서 몸이라도 풀 수 있지 우리는 그림자처럼 달라붙는 정욕을 터뜨릴 방법이 없지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하는 피로감이나 음악을 그물침대로 삼고 누워 젖가슴이나 쓸어내리는 설움이나 수다로 풀며 소나무처럼 까칠해지는 얼굴이나

좌우지간 여자직장 사표내자구 시발

 

여보게 여성동지, 고통과 고통을 왕복하는데 여자 남자가 어딨나

 

남성동무도 밖에선 눈치보고 갈대처럼 굽신거리다가 집에선 클랙슨 뻥뻥 누르듯 호통이나 치니 다 불쌍한 동물이지 아, 불쌍한 씨발

 

- 시집<세기말 블루스>(창작과 비평사 1996)

 

 

 

 이러한 노출은프리다 칼로, 두 장의 그림」이라는 제목의 시에 유방을 드러내고 양다리를 벌린 채 누워 있는 프리다의 충격적인 두 장의 사진에서 특징을 알 수 있다. 또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로 시작되는 시 「나의 싸움」에서 시인 자신의 뒷모습 누드(위 사진)를 흑백 셀프 포트레이트로 포착해 드러낸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아마도 노출을 통해 이렇듯, 삶에 지치고, 구두처럼 낡아가는 생의 뒷굽이 닳아질 수밖에 없는 30대 미혼여자의 비밀스러운 내면을 탐색한 시집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싸움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 시집<세기말 블루스>(창작과 비평사 1996)

 

 

 신현림은 1961년 경기 의왕 출생으로 시인이며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아주대에서 문학을, 상명대 디자인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아주대에서 강사를 역임했다. 신선하고 파격적 상상력, 특이한 매혹의 시와 사진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방위 작가로 실험적이면서 뚜렷한 색깔을 지닌 작업으로 다양한 연령대의 응집력 강한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침대를 타고 달렸어'를 냈다. 

 

 

남아 있는 시간

 

오랜만에 만난 이 레스토랑은

고운 비단 실은 낙타가 지나간 사막 같으오

한시절 우리가 엮은 비단은

기억 속에서 펄럭이고 밤이 오는 사막을

술로 적시며 당신과 친구가 되어 있다니

여전히 당신 손가락은 백합 같으오

해질녘이면 몰려오는 백합 냄새로 괴로웠소

어제 [남아 있는 나날]이란 영활 보았소

사람들이 밤에 불을 켤 때

최고의 시간이 되길 기대하기 때문에

항상 환호를 한다는 말이 생각나오

 

나의 나무에 환한 등불이 열린

잊을 수 없는 한시간 반이었소

은은히 빛나는 당신 머리색이 아프오

그만 일어설 시간이 다가오오

 

 - 시집<세기말 블루스>(창작과 비평사 1996)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창', 미술 에세이 '신현림의 너무 매혹적인 현대 미술', '시간 창고로 가는 길', '내 서른 살은 어디로 갔나'를 냈고, 동시집 '초코파이 자전거'가 초등 쓰기 교과서에 실렸다. 역서로 '포스트잇라이프', '러브 댓 독', '비밀엽서' 시리즈 등을 냈다. 사진작가로 두 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그녀의 사진은 낯설고 기이하고 미스터리한 생의 관점으로 덧없고 순간적인 미, 우수, 노스탤지어를 발견한다. 그녀는 솔직 소탈하며, 생태 환경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며 푹 자고 난 후 뭐든 잘할 것 같은 기분, 그것을 늘 맛보며 살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