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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정지용 첫 시집 『정지용 시집』

by 언덕에서 2013. 3. 11.

 

 

정지용 첫 시집 『정지용 시집

 

 

 


『정지용 시집』은 1935년 시문학사(詩文學社)에서 간행하였고, 1946년에 건설출판사(建設出版社)에서 재판하였다. 작자의 첫 시집으로 모두 5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총 87편의 시와 2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집의 맨 뒤에 박용철(朴龍喆)의 발문이 붙어 있다.

 1부에는 「바다 1」·「바다 2」·「유리창 1」·「유리창 2」·「홍역(紅疫)」 등 16편, 2부에는 「향수(鄕愁)」·「카페 프란스」·「말 1」·「말 2」 및 ‘바다’를 제목으로 하는 작품 5편을 포함하여 39편, 3부에는 「홍시」·「삼월(三月) 삼질날」·「병(甁)」·「할아버지」 등 23편, 4부에는 「갈릴레아 바다」·「또 하나 다른 태양」 등 9편, 5부에는 산문 2편이 실려 있다.

 1부와 4부의 작품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의 신앙시의 성격이 강하고, 2부의 시편들은 초기의 시로서 그 당시 시류와는 달리 애상(哀傷)에 빠지지 않았던 작품들이다. 3부 역시 초기의 시로서 동요류 및 민요풍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5부의 산문 2편은 소묘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박용철이 발문에서 말한 대로 정지용은 이 시집에서 사색과 감각의 오묘한 결합을 어느 정도 성취한 것으로 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바다 1」·「바다 2」·「홍역」·「유리창 1」·「해협(海峽)」·「향수」 등은 널리 알려진 대표작으로서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리창 Ⅰ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조선지광] 89호(1930.1) -

 

 이 시집은 정지용 시의 특징이 집약되어 있는바,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향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말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관한 집착과 시어(詩語)의 다각적인 변용을 시도하고 있어서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현대시 작법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시청각적 심상의 발랄함과 아울러 「유리창 1」에 보이듯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의 ‘외로움’과 ‘황홀함’의 동시적 의미와, 「홍역」에 나오는 “눈보라는 꿀벌떼처럼 / 닝닝거리고 설레는데”와 같은 충격적인 심상은 그대로 우리 시의 교과서적인 정통성을 함축하고 있다.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조선지광] 65호(1927. 3)-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 가운데 ‘바다’에 관한 시가 유독 많은 것도 한 가지 특징이다. 이것은 후일 두 번째 시집 『백록담(白鹿潭)』의 ‘산’의 시편과 대응을 이루면서 정지용의 시라는 커다란 산맥을 구축하고 있다.

 

바다 9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


이 애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휘동그란히 받쳐 들었다!

지구(地球)는 연(蓮)잎인 양 오므라들고 … 펴고 ….

 

 -시집 <시원> 5호(1935. 12)-

 

  정지용 시인은 1930년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세대를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스스로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라고 잡지 ‘시와 소설’ 창간호에서 썼던 것처럼 자신의 언어관을 적극 실천한 민족어의 거장이었다. 『정지용시집』에는 그의 초기 시 세계가 잘 담겨 있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이미지가 시집 전반에 흐르는데 대표작 ‘고향’에 잘 드러난다.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전통적 정서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감상 과잉을 철저히 배격하고, 사물 자체의 실재를 이지적이고 섬세하게 표현하는 시인이었다”고 평했다.

 

 

고향(故鄕)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동방평론](1932. 7) -

 

 한마디로 정지용은 우리 근대시사에서 하나의 큰 봉우리라 할 수 있다. 1920년대 초의 외래 문학사조의 영향을 받아 문예사조의 혼류현상(混流現象)을 이루고 있었다면, 그 중엽에 등장한 정지용은 우리의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한 것이다.

 그는 우리말의 세포적 기능(細胞的 機能)을 추구하여 그 속성을 파악하고 언어의 감각미(感覺美)를 개척한 시인으로 1930년대 한국 시단을 주도해간 보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