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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김소연 시집 『극에 달하다』

by 언덕에서 2013. 2. 18.

 

 

 

 

김소연 시집 『극에 달하다』

 

 

 

 

 

김소연(1967~ ) 시인은 1993년 계간 '현대시사상' 겨울호에 「우리는 찬양한다」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1996년 첫 시집 『극에 달하다』를 낸 이후 10년 만인 2006년에 두 번째 시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를, 2009년에 세 번째 시집 『눈물이라는 뼈』를 펴냈다. 

 시집 외에 1999년 장편동화 『오징어 섬의 어린 왕자』를, 2004년 그림책 『은행나무처럼』을, 2008년 산문집 『마음사전』을, 2012년 산문집 『시옷의 세계』를  출간했다. 현재, '21세기ㆍ전망' 동인, 월간 '현대문학' 기획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고, 일산에서 어린이 도서관 ‘웃는책’을 운영하며 어린이 도서관 운동에 많은 시간을 쓰며 살고 있다.  

 

김소연(1967~ ) 시인

 

 

 

학살의 일부 4

 

아버지의 삶을 쓰기 위해 소설에 매달린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아버지 알코올에 중독된 자신을 이기지 못하시고 박카스 한 병짜리 농약 마시곤 대낮 약수터에서 이승을 떠나셨다. 세상의 곤궁함과 그 곤궁함에 귀속되지 못하여 쩔쩔매던 중학교때 수학 선생은 여관 방에서 목을 맸고, 즐기던 그 술에 기분 좋게 취하여 귀가하던 나의 큰아버지께서 세차장 홈에 빠져 어이없는 실족사로 삶의 문을 닫아 걸었었다. 광부가 되려는 한 남자와 간호사인 한 여자가 독일로 흘러들어 사랑하고 결혼하였다. 그 부부는 채소가게로 성업 이루자 새로 산 벤츠를 타고 첫 여행을 떠났는데, 그 여행길에서 교통사고로 일가가 나란히 세상을 떴다. 위암 말기 환자였던 나의 형제는 병실 창밖으로 몰려오는 봄을 바라보다 평화롭게 눈을 감았고 유족이 된 나는 화장터에서 점화 버튼을 눌렀다. 조문 오지 못한 그의 애인이나 다름없던 기막힌 친구는 전방에서 눈사태에 죽어가는 동료를 살리려다. 눈에 묻혀 죽었다고 한다.

 

누가 더 잘 죽었는가. 살아 있는 나로서는 죽음에다 대고 한 없이 찬성표를 던지고만 있다. 아, 살아 있는 자들이여.

과연 누가 더 잘 죽어가고 계신지.

 

 -시집 <극에 달하다> (문학과 지성사 1996)

 

 

 시인이자 수필가인 김소연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경주에서 목장집 큰딸로 태어났다. 인적을 찾아보기 힘든 동네에서 사람보다 소 등에 업혀서 자랐다고 한다. 그 후 신라무덤의 도시를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줄곧 망원동에서 살았는데 우기 때마다 입은 비 피해가 어린 정신에 우울의 물때를 남겼다. 매일 지각하였고 시에 밑줄을 치게 되었다. 선생과 불화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마음과 몸이 분리되지 않고, 따라서 이 일 하며 동시에 저 일을 하는 건 불가능한 모노 스타일 라이프를 갖게 되었다.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하는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은 하기도 전에 몸이 거부하는 이다. 실제로 그럴 땐 고열을 동반한 몸살에 시달릴 정도로, 몸과 마음의 완벽한 일원론적 합체를 이룬 변종이다.

 

강릉 7번 국도

 

-잘 닦여진 길 위에서 바다를 보다 

 

다음 생애에 여기 다시 오면

걸어들어가요 우리

이 길을 버리고 바다로

넓은 앞치마를 펼치며

누추한 별을 헹구는

나는 파도가 되어

바다 속에 잠긴 오래된

노래가 당신은 되어

 

 그래서인지 마음에 관해서는 초능력에 가까운 신기를 보인다. 고양이처럼 마음의 결을 쓰다듬느라 보내는 하루가 아깝지 않고, 도무지 아무데도 관심 없는 개처럼 멍하니 하루를 보내는 데 천재적이다. 밥은 그렇다 치고 잠조차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몇 밤을 그냥 잊기도 한다. 몸에 좋은 음식에는 관심이 없고 아이스크림, 초콜릿, 커피를 주식처럼 복용한다. 게으르기 짝이 없고, 동시에 꼼꼼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음의 경영이 이 생의 목표이므로 생활의 경영은 다음 생으로 미뤄놓고 있다.    

 

 

내 오른손에 만져지는 왼손

내 왼손이 느끼는 오른손에는

애인의 손맛에 취해서 청춘을 망친 자들이

요약되어 있다

 

악기

숨구멍

마음을 감싼 이 부대자루를 조여맨 자국

정들면 지옥이라는 말의 증언대

'안다'라는 말의 산 증인

오래도록 밟아서 만든 길

본래의 천성을 어지럽힌 장본인

그럼에도 불구한 내 천성의 실마리

 

말보다 솔직해서

말보다 미더워서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한번도 받지 못한

이해라는 걸 받아보았으므로

더할 나위 없는 지복을 누렸던 손

 

마음의 바람기

마음의 육갑

마음의 단도직입

마음의 주인나리

만지는 쓰는 전화를 걸고 그의 발을 씻어주고

주먹을 쥐는 형제를 염하는

때리는 훔치는 속이는 묶는 뜯고 찢는

은밀함의 극치이며 드러남의 극치인

마음의 가장 비천한 식객

마음의 천형

 

손이 먼저 저지른 죄들로

인류는 날마다 체한 채 지구를 돌린다

종생토록 죄값을 치러도

손이 있는 한 반성하지 않으며

 

 -시집 <극에 달하다> (문학과 지성사 1996)

 

 

 김소연의 시들은 '안'으로 상정되는 어떤 중심의 '바깥'에 서 있는 한 주변 독재자의 고독과 소외의 의식을 보여준다. 자의식에 가까운 시인의 이러한 감정들이 서로 융합, 상승되면서 이 첫 시집은 전체적으로 어떤 허무의 냄새를 불러일으킨다(김진수). 『극에 달하다』는 거대한 것에 대해 미세한 것으로 대응하는 특이한 미학의 시집이다. 시집을 펼치면 첫 페이지에 ‘너무 짧은 생을 살다 간 나의 형제 김태윤에게 이 시집을 바칩니다.’라는 글귀를 만나게 된다.

 

강릉바다

 

우리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나면

이렇게 잘 닦여진 길 안에서 하염없이

걷고 걷고 또 걷고... 그러지 마요

 

길을 버리고 걸어가요

바다로 걸어 들어가요

 

넓은 앞치마를 펼치며

누추한 별을 헹구고 있는

 

나는 파도가 되어

바다 속에 잠긴 오래된

노래가 당신은 되어  

 

 두 번째 시집에 실려 있는 시 <강릉, 7번 국도>와 비슷한 톤과 내용을 가진 위의 시 <강릉 바다>는 모 일간지에 게재된 관계로 감상했는데 정작 시인의 시집에서는 찾을 수 없어 본 포스팅에 실어 본다.

 시인은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 자신에게도 들릴락말락한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 작아져서 단단한 곳에 상처와 견딤과 그리움과 사랑, 저주와 위로의 말들이 확대경이 없이는 해독할 수 없도록 촘촘하게 새겨져 있다. 거대한 형상에 감추듯 새겨진 도공의 이름처럼 그 말들을 읽지 않고는 거대한 것, 남성적인 것, 혹은 중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시인의 말, 시인의 육체가 그 세계의 자물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