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시집『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의 시집으로 1926년 회동서관에서 간행되었다. 4ㆍ6판 양장으로, 168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시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알 수 없어요><비밀><첫 키스><님의 얼굴> 등 초기 시작품이 모두 90편이 수록되었다. 8ㆍ15광복 후 동명의 시집이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그의 시는 불교적인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진 서정시인데, 그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차원의 높이로 그는 한국 현대시 사상 가장 빛나는 시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한 사람 들라고 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만해 한용운을 꼽을 것이다. 어째서 그가 위대한가? 그는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독립운동가이고, 시인이었으며, 또한 승려였으며, 혁명가였다. 그러나 여러 방면에서 남긴 숱한 업적만으로는 그의 위대함을 설명할 수 없다. 그가 민족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된 진정한 까닭은 시인 조지훈이 지적했듯이 ‘혁명가와 선승(禪僧)과 시인이 일체화’되었던 그의 생애에 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民籍)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님의 침묵>(회동서관,1926) -
시집「님의 침묵」은 한용운이 3·1운동으로 투옥돼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후 설악산 백담사에 머물며 쓴 작품집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다. 서문인 ‘군말’에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워서 이 시를 쓴다”라고 밝혔다. 돌아가야 할 집과 조국을 잃은 겨레를 위해 시집을 구상한 것이다. 표제시 ‘님의 침묵’이 그렇듯, 연애시의 형식을 빌려 종교적 깨달음과 현실 극복의 방법을 구현했다. 이혜원 문학평론가는 “낭만주의 시의 애상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정서가 지배하던 1920년대에 전혀 다른 저항과 극복의 의지를 드러냈다”고 말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시집 <님의 침묵>(회동서관, 1926)-
만약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모르는 외국의 문학 독자가 아무 선입견 없이 <님의 침묵>을 읽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틀림없이 아름다운 연시(戀詩)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남성이 아니라 님을 향한 한 여인의 시시절절한 사랑을 노래한 사포의 서정시를 연상하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해가 불교의 승려이며 기미독립운동을 일으킨 애국지사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님의 침묵>을 사랑의 시로서 읽으려 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연시 같으면서도 속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했던 사군가(思君歌)의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 결과로 님은 님이 아니라 조국을 가리킨 것이며, 침묵은 이별이 아니라 그 조국을 잃은 식민지 상황을 의미한 것이라는 모범답안을 썼다. 그래서 ‘아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 <님의 침묵>은 기미 독립운동의 좌절을 노래한 삼일절 노래가 되어버린다.
한국 문학에서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의 문학사적 의의는 현대시적인 자유시의 형태를 완성했다는데 있다. 만해는 민중불교를 제창한 승려로서, 민족의 지조를 지켜 서릿발 같은 절개와 칼날 같은 의기를 보여 주었던 독립 운동가로서, 또한 은유와 역설 등의 탁월한 기법으로 현대시적인 자유시의 형태를 완성한 시인으로서 만해 한용운은 근세사에서 귀중한 상징적 인물로서 평가받고 있다.
만해 문학의 특징을 그의 대표시집 《님의 침묵》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만해 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 사상은 곧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 사상과 민중 사상이 일체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님의 침묵》에 수록된 일련의 시들은 불교적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象徵的) 수법으로 이루어진 서정시(抒情詩)이면서, 그 속에는 깊은 사상성과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과 민족에 대한 애정이 짙게 나타나 있다. 여기서 「님」이란, 우리로 하여금 무한히 동경하게 하는 영원자(永遠者) 혹은 절대자일 수도 있고, 민족일 수도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으나, 만해는 《님의 침묵》을 통해서 그의 종교적, 사회적 활동의 전체를 관류(貫流)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존재 방식에 대한 반성과 증언의 대상을 삼았다. 또한, 진실이 부재(不在)하는 세상에 있어서의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이별―갈등―희망―만남을 통하여 슬픔과 고뇌가 희망과 의지로 승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시집 <님의 침묵>(회동서관,1926) -
결론적으로, 만해는 그의 시대를 님의 침묵의 시대로 밝혀 놓고 조국, 중생, 진리 등으로 표상되는 「님」을 통해 민족의 현실과 염원을 노래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이고 명상적(暝想的)이며, 종교적 민족적 전통에 뿌리박은 시로서, 또 민족 주체성을 지킨 고도의 역사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끝내 그렇게도 염원했던 조국광복의 날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입적, 유해는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重章)을 수여, 1967년에 비(碑)가 파고다 공원에 건립되었으며, 1973년 《한용운 전집(전6권)》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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