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사업가ㆍ문화재 수집가 전형필(全鎣弼.1906∼1962)
육영사업가ㆍ문화재 수집가. 본관 정선(旌善). 호 간송(澗松). 서울 생. 1926년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 졸업(1929). 귀국 후 오세창(吳世昌)의 지도로 민족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힘쓰는 한편, 1938년 성북동에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개설, 문화재 보존 장소로 활용했으며 1940년에는 종로구 관훈동 현 [통문관] 자리에 [한남서림]을 운영하며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1941년에는 농토를 팔아 폐교 직전의 보성중학을 인수, 운영하다가 해방 직후에는 잠시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문화재보존위원회(현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56년에는 교육공로자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60년 [고고미술동인회]를 설립, 동호인들의 친목과 우리 미술사의 정립을 위해 노력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수집한 문화재는 그의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에 보존하였는데, 수집품 중에는 42년 일본인 몰래 안동에서 거금 2,000원을 주고 구입한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서적ㆍ고서화ㆍ석조물ㆍ자기 등이 있으며, 10여 점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62년 문화포장, 64년 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사재를 털어 교육 사업에 진력하는 한편, 1942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을 구해 보존하는 등 10점의 국보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를 수집, 보관하여 문화재가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데 평생을 바쳤다.
문화재사에 신화를 남긴 간송 전형필은 재산을 털어 문화재 수집에 평생을 걸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애국자란 평을 받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애국자 소리를 듣는 것은 일제하에서 일본인들이 마구잡이로 우리 문화재를 쓸어가던 당시, 그들과 맞서 당당한 안목과 재력으로 대결했으며 일본인들이 빼앗아 간 국보급 ‘물건’을 집요하게 추적, 되사온 일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서울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잡다시피 했던 큰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간송은 경우에 따라 돈을 궤짝에 쌓아놓고 진귀한 물건을 살 때는 상인이나 다른 소장가에게 값을 묻지 않고 아예 세어가라고 말한 적도 있으며,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목판.23cm×17cm)을 살 때는 판 사람이 요구한 금액의 몇 배를 더 주고 사들인 일화가 있다.
6ㆍ25 동란 시 그는 다른 물건은 남겨 놓은 채 <훈민정음>만 가방에 챙겨 넣고 피난길에 올랐으며, 낮에는 품에 안고 밤에는 반드시 베개 삼아 잠을 잤다. 오늘날 우리글의 근본인 <훈민정음>이 전해지는 것은 간송의 이 같은 열정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그는 초반에 가짜도 많이 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가짜도 눈감고 사 주어야 좋은 물건이 들어온다.’는 말도 남겼다. 그의 문화재 수집벽은 기본적으로 엄청난 유산이라는 재력의 뒷받침과 당대 최고의 안목을 가졌던 위창 오세창 선생의 도움, 그리고 휘문고보 시절 은사였던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春谷) 고희동 선생의 도움이 컸다는 후문이다.
간송은 국내 최초의 미술관인 [보화각(葆華閣)](현 간송미술관)을 지어 소장품을 보관했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에는 국보 10점이 소장되어 있다.
<노중상봉 : 혜원전신첩 중에서, 국보135호>
전형필 선생이 1930년대의 서울 경성미술구락부에서 일본인 소장가들과 액수의 다과를 초월한 담대한 경쟁으로 귀중한 우리 문화재를 손에 넣던 쾌거는 유명하다.
간송의 고미술품 쟁탈전의 백미는 1936년 11월 22일 경성미술구락부의 ‘청화백자진사철채란국초충문병(靑華白磁辰砂鐵彩蘭菊草蟲文甁)’(보물241호)의 경매 때였다. 북경, 런던, 파리, 뉴욕 등의 지점망을 거느린 세계적 고미술품 수장가인 일본인 산중(山中)과의 경쟁에서 간송은 이 백자항아리를 1만4천5백80원에 낙찰시켰다. 그때 장안의 기와집 한 채 값이 1천원이었다니 이 액수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간송이 십만석꾼의 손꼽히는 거부였지만, 그에겐 돈보다는 귀중한 우리 문화재를 외국인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간절한 집념이 있었다.
이 같은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그는 개인의 힘으로는 상상키도 어려운 막강한 미술품 수장가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았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지도로 일본인 중개인까지 거느린 그의 문화재 수집행각은 집요하고도 눈물겨운 바가 있었다. 국보135호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란 화첩은 이미 부전(富田)이란 일본인에게 넘어갔던 것인데 그가 몇 년을 두고 각축을 벌인 끝에 큰 돈을 주고 사들였다는 위창의 기록도 있다.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사립 박물관. 최초의 민간박물관으로 1966년 전형필(全鎣弼)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하였다. 대개의 박물관이 전시 위주의 기능을 담당한 데 반해 미술사 연구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주로 한다.
간송미술관의 규모는 1층과 2층의 전시실과, 서화를 비롯하여 전적(典籍)ㆍ불상ㆍ고려 청자ㆍ조선 백자ㆍ부도ㆍ석탑 등 1000여 점의 유물이 있다. 이 가운데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을 비롯하여 10여 점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많은 유물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연구소에서는 논문집 [간송문화(澗松文華)]를 발간하는 동시에 전시회는 회화ㆍ서예ㆍ도예ㆍ서화로 분류, 개최하며 일반 공개는 봄ㆍ가을의 정기전시회에 한하고 상설전시는 하지 않는다. 또한 소장품을 모아 <추사명품첩(秋史名品帖)><겸재명품첩(謙齋名品帖)> 등 20여 권의 책자를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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