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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조선 후기의 서화가ㆍ문신ㆍ문인ㆍ금석학자 김정희

by 언덕에서 2012. 12. 22.

 

 

 

 

조선 후기의 서화가ㆍ문신ㆍ문인ㆍ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1786.6.3.정조 10∼1856.10.10.철종 7)

 

 

조선 후기의 서화가ㆍ문신ㆍ문인ㆍ금석학자. 본관 경주.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ㆍ추사(秋史)ㆍ예당(禮堂)ㆍ시암(詩庵)ㆍ과파(果坡)ㆍ노과(老果). 예산 출생.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ㆍ충청우도암행어사ㆍ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ㆍ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ㆍ옹방강(翁方綱)ㆍ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ㆍ금석학(金石學)ㆍ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ㆍ서ㆍ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48년 풀려나왔고, 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ㆍ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 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모친 유씨(兪氏)가 임신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박제가에게서 수업, 1814년(순조14)에 문과에 급제, 규장각 대교, 충청우도 암행어사, 대사성을 거쳐 이조판서에 오름. 20세 때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갔었고, 1840년(헌종6)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1851년 (철종2)에 헌종 묘천(憲宗廟遷) 문제로 북청(北靑)에 귀양 갈 때가 66세로 귀양생활이 도합 13년이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