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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가수 김정미를 아시나요?

by 언덕에서 2013. 3. 29.

 

 

 

가수 김정미를 아시나요? 

 

 

  

“난, 책임을 진다는 게 무서워...”

 그때. 김정미의 <바람>이 들렸다. 그 ‘헤비한’ 힘은 그렇게 부유하는 듯한 황홀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스모키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때 우리가 느꼈던 모든 개념의 총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이충걸 지음 <슬픔의 냄새> 36쪽

 

 일군의 뮤지션들로부터 ‘전설’로 불리는 한국 사이키델릭의 여제 김정미는 누구일까?  흔히들 김정미하면 김추자를 떠올리게 되는데 김정미와 김추자의 창법이 비슷한 것은 모두 신중현이 이들에게 노래를 지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김정미는 사이키델릭 록 창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창법은 확연한 차이가 난다. 대부분 신중현이 작곡한 김정미의 음악들은 사이키델릭 록으로 몽환적이고 관능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김정미의 음반중 <김정미 NOW-성음,SEL-100 023,73년11월>는 국내 록음반 중에서 <신중현과 엽전들> 초반과 더불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희귀음반이다.

 

 

 

 

 '신중현의 사이키델릭사운드가 최고조에 달해 물이 오를대로 올랐다’는 평가처럼 <김정미 NOW>는 김정미 독집음반 중 국내외 마니아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반으로 알려져 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자켓사진은 신중현의 사진으로 ‘코스모스는 사이키델릭을 상징한다’고 한다. 김정미는 김추자에 비해 성량은 풍부하지 못하지만 신중현 음악 스타일에 걸맞은 창법, 특히 사이키델릭 창법에서는 독보적인 가수였다. 김정미의 노래가 지니는 매력은 우선은 섹시하다는 데 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치 '저속함'과는 무관한, 우아하게 만든 한편의 에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김정미에 대한 나의 기억은 'TV 의 스크린에서 이상한 손동작과 더불어 비음이 강한 묘한 창법으로 노래 부르던 신들린 여가수' 정도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되살아나는 기억 속의 그녀 노래에 비로소 사이키델릭이 뭔지를 깨닫게 되었다. 흑백 TV를 통하여 만난 김정미에 대한 기억은 아주 또렷하다. 김정미보다 먼저 나왔던 김추자의 '흔들어 대던' 모습도 생생하다. 그러나 김정미의 이미지는 김추자의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것과는 달리 뭔가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적절한 표현이 없을까? 그렇다. '몽환적'이라는 …….

 

 

 가수 김정미는 1953년 서울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1남 5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발레, 고전무용, 미국의 록음악을 즐겨들었는데 아레사 프랭클린과 제퍼슨 에어프레인을 좋아했다고 한다. 

 1971년 정신여고 3학년 재학 중 친구들과 신중현 사단 사무실에 들렀다가 보컬로 픽업되었고, 명동 로얄호텔 등지에서 신중현 사단 빅밴드의 객원 보컬로 데뷔한다. 이듬 해 <만나고 헤어진다면>, <대합실의 여인>으로 데뷔음반을 발표했는데 그해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입학했고, 당시 스캔들로 얼룩졌던 다른 가수들과 다르게 자기 관리에 철저 했으며, 가수로써 상당히 성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 <NOW>, <바람> 음반 발표, <햇님 봄> 씽글 앨범 발표했으며 이듬해인 1974년 <김정미 모음집>을 발표했다.

 그러나 1975년 가요정화조치로 그녀 노래의 대부분이 '창법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 당하게 되고  짧은 4년간의 활동을 끝으로 신중현 사단을 떠난다(당시 23세). 이후 1977년 여러 가수와 함께 발표한 다른 작곡가의 노래와 제니스조플린의 번안곡 발표 후 가요계를 완전히 떠난다. 그녀가 남긴 음반은 모두 14장으로 신중현 작품은 12장이 있고 다른 작곡가의 음반 2개가 있다.

 현재 미국 LA근교에 살고 있고 지금 남아 있는 작품은 8개 정도만 전해지고 나머지는 종적이 묘하다. 2002년 <바람 , NOW> 음반이 재 복원되었다.

 

 

 

 이 음반 <바람>은 1972년 작으로 psychedelic 음악을 본격 시도한 곡이다. 물론 김정미를 실험 가수로 창법을 주입시켰으며 한국적 록 음악의 장을 넓히는데 성공하여 나는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못 한 것은 당시 가요계는 우후죽순 같이 너도나도 작곡 붐이 일고 서로 치열한 경쟁이 시작 되자 서로 자기 잘 낫다 하며 헐뜯고 하는 과정에 방송국은 돈 드는 방송국으로 변했고 서서히 방송가에서 밀려 언더에서 활동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라이브 공연을 자주 하면서 가수들은 실전에 강한 가수들이 되어 신중현사단의 가수들은 무대에서 많이 활약하게 되었다.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현, 박인수 등 거의 Live 무대를 장악한 가수들이었다. <바람>과 <어디서어디까지> 등 이 2곡은 김정미를 변모 시킨 곡들이다. 나는 새로운 음악을 시도 하는 과정에 김정미를 썼던 것이 새로운 한국적 사이키델릭 록 가수를 탄생 시키게 된 것이다. -'신중현 자서전'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