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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프랑스 시인ㆍ소설가ㆍ극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1802.2.26∼1885.5.22)

by 언덕에서 2012. 12. 26.

 

 

 

프랑스 시인ㆍ소설가ㆍ극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1802.2.26∼1885.5.22)

 

 

 

 

프랑스 시인ㆍ소설가ㆍ극작가. 프랑스 낭만파 최대의 대표시인이었다. 브장송 출생. 부친은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 모친은 낭트의 선주(船主)의 딸. 육군 사관(士官)으로 만들어보겠다는 부친의 기대를 배반하고 그는 시를 쓰는 데 몰두하다가 1817년 아카데미가 모집하는 시에 응모하여 당선, 위대한 샤토브리앙의 인정을 받았다.

 위고는 거의 19세기 전체를 살아, 장수의 생애를 느렸다. 대혁명 후의 제1제정(帝政)ㆍ왕정복고(王政復古)ㆍ7월 혁명ㆍ2월 혁명ㆍ제2공화ㆍ제2제정ㆍ제3공화에 이르는 모든 정치 변혁과 더불어 시대사조가 흘러서 구비치는 그 가운데를 뚫고 언제나 생장하여 마지않는 자연의 거목(巨木)처럼 항상 일대(一代)를 군림 통솔한 것이 위고의 일생이었다.

 그의 작품은 시집이 20권이며, 극작(劇作)이 10부, 장편소설 10편, 논문집이 5권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량이다. 최후까지 그의 창작력이 얼마나 왕성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일찍부터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고, 샤토브리앙의 문학적 보호를 받고 있던 청년 위고는 ‘샤토브리앙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가 되느냐의 둘 중에 하나이다.’라고 그의 작시첩(作詩帖)에 기록하였다.

 1882년 처녀시집인 <서정시집>을 발표, 그 후 문학에 전념하는 생애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소설 <한 디슬랑드(Han d'slande)>(1823) <뷔그 자르갈(Bug Jargal)>(1825), 희곡 <크롬웰(Cromwell)>(1827)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으로 그의 문학적 명성은 결정되고, 특히 그 서문은 고전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승리적 선언으로 유명하다. 일면, 시인 위고의 시의 다산(多産)은 경탄할 수밖에 없다. <동방시집(東邦詩集)>(1829) <가을 낙엽>(1831) <황혼의 노래>(1835) <마음의 소리>(1837) <빛과 그늘>(1840)이 있다. 이것은 점점 뒤에 발표한 것이 될수록 문체의 화려함보다도 깊이가 짙어갔다.

 극작에 있어서는 <마리옹 들로름(Marion Delorme)>(1829)을 써서 상연 금지가 되자 10일 후에 <에르나니(Hernani)>를 완성하여 1830년 2월 25일에 이를 무대에 올려 공연하였다. 이 상연에 있어 고전파의 방해가 예측되었으므로 위고의 찬미자들은 전적으로 협조자가 되었고, 특히 고티에는 붉은 조끼를 입고 머리칼을 사자의 갈기처럼 올려 세워 진두에 서서 분투하였다. 결정적으로 승리하여 위고는 그 중심에 제왕처럼 자리 잡고 앉았다.

 운문희곡으로서는 <왕은 즐긴다>(1832) <뤼 블라(Ruy Blas)>(1838) <뷔르그라브(Les Burgraves)>(1843) 등이 있고, 산문으로 쓴 것에 <뤼크레스 보르자(Lucrece Borgia)>(1833) <마리 튀도르(Marie Tudor)>(1833) <앙젤로(Angelo)>(1835)가 있다.

 소설에 있어서는 15세기의 파리를 그대로 재생하려고 시도한 역사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1831)는 그의 최대 걸작의 하나였다.

 1841년 그는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843년 <뷔르그라브>의 상연 실패를 계기로 극작을 단념하였다. 거기에다 또 가장 사랑하던 딸 레오포르딘(Leopordine)이 남편과 같이 센 강에 투신자살한 것이 큰 충격을 주어 1850년까지는 붓을 던지고 주로 정치가로서 활약하였다. 처음에 그는 왕당파였으나 뒤에 ‘오를레아니스트’(오를레앙 공의 집을 왕으로 모시자는 파)에 접근, 오를레앙 공비의 추천으로 1845년 상원의원이 되었다. 2월 혁명 이후 뒤에 나폴레옹 3세가 된 루이 나폴레옹의 대통령 입후보를 저지했으나, 곧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어 1852년 이후 1870년까지 18년간 국외 추방을 강요당했다. 그것은 나폴레옹 3세의 제정(帝政) 수립을 정면에서 반대한 까닭이었다.

 

 

 

 

 

 18년간 그는 부르셀에서 혹은 영령 저지 섬에서 망명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고국을 떠나 다시 시인의 생애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의 시는 점점 더 원숙 되고,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는 격정(激情)이 그 속에 담겨있었다. 1853년 발표된 시집 <징벌시집(懲罰詩集)>은 나폴레옹 3세에 대한 분노의 시집이었다. 1856년의 <명상시집(瞑想詩集)>은 익사한 딸의 추억, 그의 25년간의 생활의 역사이다. 1859년 강지섬에서 쓴 <세기의 전설>은 위고 최대의 걸작임과 동시에 프랑스 최대의 서사시가 되었다. 그 밖에 정치론 <소인(小人) 나폴레옹>(1853)이 있지만, 그의 시종 일관한 신념은 민중에 대한 진실한 애정이며, 이 유토피스트적 정치이상(政治理想)은 그가 시인의 사명으로서 그의 작시(作詩) 태도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 다.

 오랫동안 소설에 손을 대지 않았던 그는 1862년 그의 최대의 명작 <레미제라블>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그의 문학적 생애의 절정을 나타내는 것이며, <노트르담 드 파리>와 이 소설과 3부작(三部作)을 이루는 <바다의 노동>(1866)와 <웃는 사나이>(1869)를 쓴 그는 바로 프랑스 문학계의 제왕이며, 거성(巨星)이었다.

 1870년 제정(帝政)이 무너진 후 파리에 돌아와 상원의원이 되었으나, 1872년 최후의 소설 <93년(Quatre vingt treize)>(1873)을 썼다. 이때는 벌써 낭만주의는 가고, 사실주의․자연주의가 일어나고 있었고, 시에서는 상징주의가 오고 있었다.

 1885년 파리에서 서거하여 장례식은 국장(國葬)으로 팡테옹에 묻혔다. 그는 문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받았던 것이다. 평생을 두고 그가 견지한 것은 자유․평등의 신념이며,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웅건한 필치는 그를 19세기 최대의 문호(文豪) 로 만들었다.

 위고의 작품에서 독자가 받는 강렬한 인상과 감동은 그의 다이내믹한 생명력에서 오는 변화무쌍한 창조력, 무진한 상상력, 강렬한 감정 등에서 온다. 이 거대한 창조력은 그로 하여금 시, 연극, 소설 등 여러 분야에서 창작하게 했으며 각 분야에서도 다양한 부문에서 작품을 써 그가 손대지 않은 문학 부문은 거의 없다.

 시인으로서의 주된 힘은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은 무궁무진할 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상상하는 바를 실제로 있는 존재같이 정확 명료하게 보는 힘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는 서사시, 역사 소설, 환상극 등에 있어서 뛰어나며 자연이나 환경, 인물 묘사에 탁월했다. 구약 성서 시대의 인물들의 성격과 생활, 중세 기사들의 영웅적 모험, 나폴레옹 휘하의 군대의 전투 장면 등 세밀한 사항에 이르기까지 실제와 방불하게 묘사함은 풍부한 고증이나 사실보다는 강력한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시인 빅토르 위고에게는 치밀한 지성이나 분석적인 정신이 없는 대신 크고 풍부한 감정과 감수성이 있었다. 차라리 그는 감정의 큰 불덩어리였다. 이러한 감정은 그의 작품과 생활에서 일차적으로 사랑으로 나타난다. 특히 가족에 대한, 그리고 어린이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으로 나타난다. 또 이 사랑은 확산되어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압박 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박애 사상으로 번져 그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이렇게 강력하고 웅건한 상상력과 우주 만상에까지 펼치는 감정을 위고는 또한 천재적인 언어의 구사로 자유분방하게 표현했다. 그의 문장은 숨 쉬듯 자연스러웠으며 강물같이 도도했으며 장엄 화려했고 많은 이미지를 동반했다. 이로써 그는 가장 비근 평범한 일과 사물에 생명을 주고 일상적인 행위와 감정을 승화시켜 우주적인 비전을 일으키는 마력을 지녔다.

 물론 그에게 결점이나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상력이 지나쳐 때로 터무니없는 공무 중 부상으로 흐르는 점, 위대와 장중을 좋아하는 허장성세, 웅변조, 지나친 언어의 기교, 대중에 영합하는 통속성 등 열거하면 많다.

 그러나 이 모든 결점을 내포하면서도 그는 19세기의 프랑스 문단의 최고봉이었으며 프랑스 문학사의 빛나는 거성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항했다. <레 미제라블>을 발표했을 때 그는 출판사 사장에게 '?'라고 물음표만 있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출판사 사장은 잘 팔린다는 뜻으로 '!' 하나만 적힌 답장을 보냈다고 하나, 세계에서 가장 짧은 편지를 주고받은 셈이다.

 

【시】<오드와 발라드>(1826) <세기의 전설>(1859)

【시집】<서정시집>(1882.처녀시집) <동방시집(東邦詩集)>(1829) <가을 낙엽>(1831) <황혼의 노래>(1835) <마음의 소리>(1837) <빛과 그늘>(1840) <징벌시집(懲罰詩集)>(1853) <명상시집(瞑想詩集)>(1856)

【소설】<아이슬란드의 한>(1823) <뷔그 자르갈(Bug Jargal)>(1825) <노트르담 드 파리>(1831) <레 미제라블>(1862) <바다의 노동자>(1866) <웃는 사나이>(1869) <93년(Quatre vingt treize)>(1873.최후작)

【희곡】<크롬웰>(1827) <마리옹 들로름(Marion Delorme)>(1829) <에르나니>(1830) <왕은 즐긴다>(1832) <뤼크레스 보르자(Lucrece Borgia)>(1833) <마리 튀도르(Marie Tudor)>(1833) <앙젤로(Angelo)>(1835) <뤼 블라>(1838) <뷔르그라브>(1843)

 

 

 

 

 

 

<위고의 문학인생>

 

나폴레옹군(軍)의 장군의 아들로 Besancon에서 태어난 유고는 1817년 15세의 나이로Academie francaise가 주관하는 시 부문에서 상을 받고 Chateaubriand의 인정을 받은 그는 1822년 첫 시집 <Les Odes>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문인으로서 출발하게 된다.

 그는 여러 편의 희곡을 잇달아 출간하나 그의 희곡 <Burgraves>(1843)가 너무나 황당무계한 것이라는 관객의 빈축을 사 실패한 것과, 사랑하던 딸 Leopoldine의 죽음은 그에게 집필의 공백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 때에 그는 정치로 시야를 돌려 자유와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Napoleon 3세의 쿠데타를 반대함으로써 영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1870년 Napoleon 3세가 몰락함으로써 파리로 되돌아온 때는 이미 Realisme 및 Naturalisme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시에서는 Symbolisme이 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Romantisme의 시대는 이미 지나, 엄밀히 말해 유고의 시대는 막이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거의 모든 문학 장르를 섭렵하고 그 시대의 새로운 문학을 펼쳐 나갔던 그는 폭넓은 주제와 광활한 상상력, 날카로운 풍자와 적극적인 도전으로 불문학 사상 희대의 작가, 희곡가, 그리고 시인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1862년 발표된 <Les Miserables>은 모든 스타일과 소재, 다양한 내용이 혼합되어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의 세계로 잘 정돈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워털루대전과 왕정복고의 혼란을 그린 역사소설의 성격을 띠면서, 민중의 영광을 희원하는 인도주의의 시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의 자전적 서정소설의 성격을 띠는 동시에 저열하고 비속한 당시의 풍속을 폭로한 사실주의적 소설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평생 죄인으로 쫓겨야 했던 주인공 Jean Valjean과 맹목적으로 법을 맹신하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만을 지상의 목표로 삼고 Jean Valjean을 추적하다가 마침내 그것의 허상성을 깨닫고 자살하는 Javert 등의 인물을 통해 Hugo는 논리와 조직만으로 인간의 행복이 가능한 것은 아니며, 사람들 사이에는 인정과 자비와 연민이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사회가 이러한 요소들을 무시한 법률의 기계적인 해석과 적용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사람에게 쓸 수 있다면 빅토르 위고는 이 형용사를 받기에 적합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일찍이 앙드레 지드는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여, "할 수 없다, 위고다"라고 했다는데, 그의 이 평은 위고가 많은 인간적 내지 예술적 결함을 가졌으나 그의 위대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충을 피력한 말이다.

 19세기를 거의 다 살면서, 이 긴 세월 동안 그는 위대한 시인, 위대한 극작가, 위대한 소설가, 위대한 사상가였고 또 위대한 투쟁가였다. 한때 그의 목소리는 프랑스 민중 양심과 감정과 희망의 울림 판이었으며 그의 박애주의적 인도주의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전 유럽 사회에 빛을 던져주었다.

 이미 14세의 소년 시절에 "샤토브리앙이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무"라고 쓰고 문학에 뛰어든 그는 26세에 시집 <오드>를 출판하여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이래 1843년 장녀 레오폴딘의 익사로 인해 잠시 동안 문학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6권의 시집, 3편의 소설, 9개의 연극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시집으로서 <동방 시집>, <가을 나뭇잎>, <황혼의 노래>, <빛과 그늘> 등이, 소설로서는 <파리의 노트르담>, 연극으로는 <크롬웰>, <뤼 블라스>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정력적인 그는 쉴 줄 모르는 창작 활동과 동시에 열정적인 문학 활동도 폈다. 연극 <에르나니> 공연을 둘러싸고 일어난 고전파, 낭만파 싸움에서 사령관 위고는 학생, 문학청년, 무명 화가들, 그리고 네르발이니 고티에 등의 20대의 젊고 전투적인 시인들을 동원하여 육탄적인 공격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당시의 쟁쟁한 시인, 작가들, 비니, 뒤마, 메리메, 발자크, 생트뵈브, 네르발, 고티에 등을 자기 집에 모아 일종의 낭만파 문인 클럽 세나클을 조직함으로써 낭만파 운동의 총수가 되었으며 젊은 세대의 우상이 되었다. 그는 1841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843년은 그의 생애에 전기를 이루는 해였다. 위고의 사랑하는 장녀 레오폴딘이 이 해 결혼한 지 얼마 후인 9월 4일, 남편과 함께 센 강 하류에서 보트를 타다가 보트가 뒤집혀 남편과 함께 익사했다.

 졸지에 사랑하는 딸을 잃은 충격으로 위고는 언어 상실증에 걸렸다. 겨우 1년만에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으나 이 시기를 계기로 그는 문학 운동과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혁명적인 이상을 사회에 펴기 위해 정치에 깊이 관여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시인의 사명은 민중의 목소리가 되어 그들의 대변자 또는 인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향의 결과 위고는 1845년 왕당파로 프랑스 국회 상원 의원이 되었고, 1848년 2월 혁명 후에는 파리 출신 제헌 의회 의원으로, 또 입법 의회 의원으로 활약하며 가난한 자와 피압박자의 편에 서서 자유, 평등, 공화 체제를 위한 싸움에 가담했다. 드디어 군과 우익 정당을 배경으로 등장한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반민주적인 헌법 개정을 하자 위고는 그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가 되었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하고 반대파와 공화파 의원을 체포할 때 첫 번째 대상이 된 것이 그였다. 위고는 파리 시민을 봉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동료 의원 72명과 더불어 프랑스를 떠나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은 이후 19년 동안 계속되었다. 위고는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영불 해협의 저지 섬으로, 다시 고도 게르네지로 옮겨 이 섬에서 1870년 고국에 돌아오기까지 15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냈다. 이 동안 그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으로부터 두 번에 걸친 사면령과 귀국 권고를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자유의 회복 후에야 비로소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 괴롭고 외로운 망명 생활은 그를 슬프거나 좌절케 하지 않고 도리어 그는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이때에 창작 또는 완성시켰다. 루이 나폴레옹을 매도한 <범죄의 역사>, <소 나폴레옹> 그리고 역사에 유례없는 추억의 시를 담은 서사시 <세기의 전설> 그리고 위대한 소설 <가엾은 사람들>, 평론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설 <바다의 일꾼들>, <웃는 남자>, 환상적인 서정 시집 <길과 숲의 노래> 등이 있으며 그 중 한 작품만으로도 가히 한 작가의 영광을 가져올 수 있는 명작들이었다.

 위고는 나폴레옹 3세가 보불 전쟁에 패하여 퇴위, 망명하고 파리 시가 프러시아 군에 의해 완전 포위되기 직전 파리로 돌아왔다. 이 극적인 입성은 용감하고 희생적이었으며 파리 시민들은 그를 애국적 영웅으로 맞이했다. 이로부터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만년의 생활은 주로 창작 활동에 바쳐졌다.

 비록 그는 다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파리 지역의 상원 의원이 되었으나 정치에서는 실패와 실망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 활동은 쉬지 않아 파리의 농성과 점령을 다룬 시 <끔찍한 해>, <할아버지가 되는 법>, <세기의 전설>의 보충편과 최종편 등의 시와, 과학 문제를 다룬 <나귀>, <정신의 네 바람>, 소설로서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야기를 다룬 <93년> 등 노년에 이르러서도 무한한 재질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1885년 5월 22일 83세를 일기로 죽고 프랑스 정부는 이례적으로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정했다. 6월 1일 그의 유해는 긴 국장 행렬 가운데 온 파리 시민들의 애도와 추모를 받으며 개선문에서 팡테옹으로 향했다. 가난한 사람의 영구차와 간소한 장례식을 요구한 그의 유언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어록>

 

"참사랑의 첫 특징은 남성은 겁쟁이가 되고 여성은 대담해지는 것이다." The first symptom of true love in a man is timidity, in a girl it is boldn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