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미 시집 『곰곰』
시집『곰곰』은 2001년 계간 〈문학동네〉로 등단하여, 거침없고 활달한 상상력과 감각적이고 유연한 시어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안현미 시인(1972 ~ )이 2006년 발간한 첫 시집이다. 시인만의 독특한 말법으로 재미와 무게감을 함께 담아낸 5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감각적이고 유연한 시어로 쉽고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가난과 외로움, 기다림으로 점철된 유년의 통로를 소재로 쓴 애잔한 시편들로 무게감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곰곰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었다지
여자가 되겠다고?
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
여자를 꿈꾸며 행복하기는 했니?
그런데 넌 여자로 태어나 마늘 아닌 걸
먹어본 적이 있기는 있니?
-시집 <곰곰>(2006>
안현미 시인은 2006년 『곰곰』(복간 2011)에 이어 2009년 『이별의 재구성』을 펴내고 제28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
거짓말을 타전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시집 <곰곰>(2006>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거짓말을 타전하다」)던 유년 시절의 기억과 “피를 뽑기 위해 피를 빨리는 무서운 생업”(「함부로」)에 매달리는 누추한 현실은 시인에게 “고독(苦毒)이자 고독(孤獨)”(「시마할」)이다. 문학평론가 김진수는 해설에서 “이 가난과 고독의 그림자들을 그리움이라는 서정에 기대어 어떤 맑고도 따뜻한 심리적 풍경으로 전이시키는 것처럼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곰곰』은 어딘지 불편하면서도 따뜻하다.
비처럼 음악처럼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를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배불을 붙어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봐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
춘천을 떠나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눈썹에서 주워온 몇 개의 비애를 안주로 비루를 마실 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백조는 물 위에서 뒤뚱뒤뚱, 그 뒤뚱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아직도 찬송가처럼 몇 개의 빗방울 흩뿌리고 있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시집 <곰곰>(2006>
그래서 더 짠한 감동과 깊은 울림을 준다. 시인은 쾌활한 웃음 속에 비애가 담긴 대상들을 발명하고, 캐내고, 요리한다. 그 대상이 과거의 온전한 기억이든, 기억이 재조합한 환상이든, 안현미 시인의 “마리화나 같은 추억”(「하시시」)은 시인이 조리한 『곰곰』의 깊은 맛의 주재료인 듯하다.
하시시
바람이 분다
양귀비가 꽃피는 그녀의 옥탑방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어제, 다녀갔다
하시시 웃고 있는 여자
환각을 체포할 수 있는 영장은?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오늘, 다녀갔다
사랑은 떠나지 않아도 사내는 떠났다
하시시 울고 있는 여자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내일, 다녀간다
하시시 피어오르는 향기
그림자를 체포할 수 있는 영장은?
마리화나 같은 추억
하시시 바람이 분다
아편과 같아 사내는,
중독을 체포할 수 있는 수갑은?
그녀의 옥탑방
하시시
양귀비꽃 붉다
-시집 <곰곰>(2006>
이 시집『곰곰』에서 시인은 없음으로 오히려 형상성을 강화하는 서정의 재주도, 모성의 사회비판을 노출시키면서 다스리는, 연륜의 재주를 보이고 있다. 위험할 정도로 천박해진, 거의 시사적인 작금의 문학 신구 구분을 그녀의 시는 아주 가뿐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교란시킨다. 그녀는 가장 오래된 소재를 새로운 문법으로 다루고, 가장 새로운 소재를 오래된 문법으로 다룬다.
대낮의 부림 나이트로 오실래요?
장바구니를 들고 와도 좋아요 입장료 3천 원만 내시면 검은 커튼이 쳐진 카운터에서 웨이터 클놈을 찾으세요 시장바구니에 담긴 생선처럼 한 물간 스타들도 있어요 조용팔과 너훈아 패쓰김이 보이지요? 왕년의 스타들 노래를 들으며 휙휙 돌아버린 세상 우리도 빙빙 돌아봐요 파트너가 없으시다구요? 정육점 불빛 같은 조명 아래 남자들을 못 보셨군요? 거기 전깃줄의 제비처럼 양복을 빼 입은 남자들이 총총히 앉아있잖아요? 그들 모두 저격수를 기다리는 제비들이죠 장바구니에 담아온 장총을 꺼내세요 그리고 마음에 드는 제비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요 총알이 빗나가도 제비는 영락없이 당신에게 사로잡힐 테니 걱정 같은 건 붙들어매세요 이제 준비가 되셨나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학원으로 갈 테고 남편은 부림장에서 열심히 땀흘리고 있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럼 시작할까요? 간드러지게 꺾이는 트롯트에 맞춰 비듬 낀 일상을 털어 버리세요 부림나이트가 왜 부름나이튼지 아세요 사모님? 반찬걱정 돈걱정 오만걱정 다 잊어버리고 신나게 몸부림치는 곳이라서 <부림나이트>죠 <몸부림나이트>는 좀 저급하잖아요 우리 고급스럽게(몸)復臨 쳐봐요 한물간 삶도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신다구요? 그럼 내일도 대낮의 부림 나이트로 오실래요? 싸모님!
-시집 <곰곰>(2006>
조용호 작가는 시인을 이렇게 평했다.
(전략) 그네는 일단 ‘타고난 시인’ 같다. 타고나지 못한 시인들이 들으면 억울하겠지만, 그네는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그것도 잘 쓸 수밖에 없는 시를 살아왔다. 남인수의 노래를 남인수보다 더 잘 부르는 남자, 장동건이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이 때문에 빛이 바랬을 남자가 시인의 아버지였다고 했다. 그 아버지가 조강지처를 따로 두고, 서른도 되기 전에 남편과 사별한 채 딸 둘을 키우던 태백 장성광업소 부근의 여인을 만나 그네를 낳았다. 아비는 탯줄을 직접 자신이 끊을 정도로, 갑자기 불어난 아우라지 강물에 떠내려가던 젖먹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을 정도로, 그 딸을 예뻐했다. 그네는 여섯 살 무렵 아버지의 조강지처에게 보내졌고, 깊은 막장과 넓은 세상의 길 위를 오가던 아버지는 늘 바깥에 있었다. 어느날 불쑥 돌아온 무법자 같던 아버지와는 그가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했다. 그네는 ‘고독의 발명가’로 살았고, ‘고장난 추억’을 저장했다. (후략)
-[출처]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4> 안현미 ‘곰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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