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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백석 시집 『사슴』

by 언덕에서 2013. 1. 28.

 

 



 

백석 시집 『사슴

 

 

 

 

 

 

미지의 신인이었던 백석은 1936년 1월 100부 한정판 시집 『사슴』을 발간했다. 적은 부수를 발간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백석의 시집은 구하기 힘든 희귀본이었다. 윤동주가 백석의 시집 발간 소식을 듣고 애써 이 책을 구하고자했으나 구하지 못하고 직접 육필로 필사본을 만들어 백석 시를 애독했다는 것은 오래 전에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사슴』초판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만 소장되어 있다. 

 

모닥불


새끼 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하는 아이도 새 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너울 : 외출할 때 여자가 둘러쓰던 깁, 면사포

-검불 : 풀, 낙엽 따위

-몽둥발이 : 딸려 있던 것이 다 떨어져 나가고 몸뚱아리만 남아 있는 모습


 - 시집 <사슴>(1936) -

 

 

 백석이라는 시인은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오로지 민족 분단에 있다. 우리 민족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분단됨으로써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이북에 남아 있거나 월북한 작가들의 작품을 오랫동안 이남에서는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본명이 백기형인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4년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같은 학교를 다닌 선배 시인 김소월을 몹시 선망하였다 한다.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백석은 일본으로 유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했고, 1934년 귀국해서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1935년에 [조선일보]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그는 이듬해인 1936년 1월에 시집 <사슴>을 출간하였다. 그 해 [조선일보사] 기자를 그만둔 백석은 교사 생활을 잠시 했고, 1938년부터는 만주에 거주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가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이렇게 당시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았던 백석의 시 세계는 어떠한가. 먼저 그의 시집 <사슴>에 실렸던 <여승(女僧)>이라는 시를 보자.  

 

여승(女僧)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노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가지취 : 취나물의 일종. 

-가지취의 내음새 : 속세를 떠난 지 오랜 모습

-금덤판 : 금광.  금점판

-섶벌 : 재래종 일벌.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 어린 딸의 죽음

-산꿩의 울음 : 여인의 울음 상징

-떨어지는 머리오리 : 여인의 눈물 방울 상징

 

 - 시집 <사슴>(1936) -

 

 이 시를 보면 일단 향토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가지취’, ‘도라지’, ‘섶벌’, ‘산꿩’ 같은 시어(詩語)들이 그렇고, 또한 시 속의 여인의 모습이 그러하다. 일본 유학을 갔다 온 대개의 지식인들이 서구적 분위기의 시를 썼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시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백석은 다른 모든 시에서도 주로 전통적인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여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를 많이 구사하였는데, <백석 시전집> 뒷부분에는 그의 시에 나온 낱말 6백여 개에 대한 풀이가 되어 있어 작품을 감상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리고 백석의 시에는 주로 그의 어린 시절의 추억과 그곳 사람들의 삶이 마치 이야기하듯 나타난다. <여승>도 마찬가지로, 이 시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풀어 말한다면,

 “남편이 집을 나가는 바람에 어린 딸을 데리고 금광에서 옥수수를 팔며 어렵게 살던 어떤 여인이, 딸이 죽고 나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있더라.” 라고 줄거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안타깝고 슬픈 사연을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하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은 백석 시의 이러한 특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시집 <사슴>의 세계는 그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실로 속임 없는 향토의 얼굴이 표정(表情)한다.

 그렇건만 우리는 거기서 아무러한 회상적인 감상주의에도 부어오른 복고주의에도 만나지 않아서 더없이 유쾌하다.

 그 점에서 <사슴>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 미각에도 불구하고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는 것이다.”  -김기림 : <백석 시집 독후감>(조선일보, 1936. 1. 29)-

 요컨대, 백석은 북방의 어느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여 그곳의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를 썼는데, 그의 작품 활동 시기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가장 극렬하게 자행되었던 시기였음을 고려한다면, 그의 시가 갖는 이러한 특징들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다. 즉, 그 시게에 우리 민족의 전통과 구수한 토속어를 지키는 것 자체가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며, 그런 점에서 백석은 참다운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백석의 시를 읽다 보면, 옛날 우리 민족의 삶과 전통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고, 또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어 즐겁다.

 

여우난 곬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後妻)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 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비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 곬족 : 여우가 난 골짜기 부근에 사는 일가 친척들.

*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 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 솜솜 : 얼굴에 잘고 얕게 얽은 자국이 듬성듬성 있는 모양

* 포족족하니 : 빛깔이 고르지 않고 파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화가 나서 토라지는 모양.

* 매감탕 : 엿을 고거나 메주를 쑨 솥을 씻은, 진한 갈색의 물.

* 설게 : 섧게, 서럽게.

* 토방돌 : 집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 오리치 : 평북 지방에서 오리 사냥에 쓰이는 특별한 사냥 용구.

* 끼때 : 끼니때

* 반디젓 : 밴댕이젓.

* 저녁술 : 저녁밥.

* 숨굴막질 : 숨바꼭질.

* 아르간 : 아랫간. 아랫방.

* 조아질하고 - 제비손이구손이하고 : 아이들의 놀이 이름들.

* 화디 : 등잔을 얹는 기구. 나무나 놋쇠로 만듦.

* 홍게닭 : 새벽닭.

* 텅납새 : 처마의 안쪽 지붕.

* 무이징게 국 : 민물새우에 무를 넣고 끓인 국.

* 흥성거리는 : 활기차게 자꾸 떠들다.

 

 - [조광](1935. 12) -


 <사슴>은 작년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인의 대표 시집이다. 토속적 세계를 재현한 작품과 풍경이나 정황의 이미지를 제시한 작품으로 크게 양분된다. 대표작으론 ‘가즈랑집’ ‘여우난곬족’ ‘고방’ 등이 있다. 이숭원 문학평론가는 “수식어가 수식어의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지는 구어적 서술, 토속적 방언, 토속적 배경과 인물들이 자아내는 정취는 백석 이전에 시로 표출된 적이 없는 전적으로 새로운 양식이었다. 당시 한국시가 창조한 가장 개성적인 미학”이라고 설명했다. 『사슴』은 2005년 현역 시인 156명이 뽑은 ‘우리 시대 시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