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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방영웅 장편소설 『분례기(糞禮記)』

by 언덕에서 2016. 12. 22.

 

방영웅 장편소설 『분례기(糞禮記)』

 

 

방영웅(方榮雄.1942 ∼ )의 3부작 장편소설로 1967년 [창작과 비평]지 여름호ㆍ가을호ㆍ겨울호(통권 6ㆍ7ㆍ8호)에 발표한 첫 작품이자 대표작이다. 1968년 홍익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표현 방법의 토착화, 드라마의 원색성, 간결한 문장, 대담한 성 묘사 등 많은 문제성을 내포한 이 작품은 당시 문단의 화제는 물론, 장기간에 걸친 베스트 셀러였다.

 충청도 예산 지방의 어느 시골을 모델로 했다는 이 작품은, 한국 농촌의 전근대적인 풍속, 생활양식, 그리고 전설ㆍ속담 등이 다채롭게 활용되고 있으며, 용팔, 콩조지, 호랑할매 등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등장인물의 전형성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토속적 니힐리즘에 입각한 시골 사람들의 불쌍한 생활 영식을 시적으로 표현한 우리 문학의 역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토속적인 세계와 6ㆍ25전쟁의 혼란을 배경으로 천하고 박복한 여인의 비극적인 숙명을 그린 이 작품은 1971년 태창영화사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똥례는 어머니가 변소의 인분 위에서 낳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한편으로는 액땜도 되고 명이 길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똥례는 매일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닌다. 똥례와 함께 나무를 하러 다니는 여인들은 대개가 과부들인데 어머니인 석서방댁은 그 과부들의 언행이나 품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딸이 용팔과 함께 나무를 하러 다니도록 지시한다. 먼 친척이 되는 용팔은 동네에서 고자라고 소문이 나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똥례가 어떻게 될까봐 걱정을 않아도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용팔은 고자가 아니었다. 용팔은 어느 날 산에서 똥례를 겁탈한다. 똥례는 자신이 용팔에게 당하고 나서도 별 충격을 받지 않았지만 자신과 동갑나기인 친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에게 겁탈을 당하고 나서 목을 매달아 죽은 사건이 발생하자 똥례는 심한 충격을 받는다. 똥례는 자신도 그 친구처럼 순결을 잃었으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죽겠다고 결심까지 해보지만 죽지는 못하고 아버지 석서방의 주선으로 노름꾼인 영철의 재취로 들어간다.  

 똥례의 결혼 생활은 행복할 수가 없었다. 남편인 영철이 매일 노름방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똥례는 시집을 와서도 용팔에 대한 사모의 정을 금치 못하면서 읍내를 떠돌아다니고 있는 미친 여자 옥화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런 감정과 함께 옥화를 자신과는 또 다른 똥례라고 생각한다.

 징을 울려가며 극장 광고판을 메고 다니는 콩조지는 옥화를 범하여 임신을 시킨다. 해산일이 닥쳐오자 콩조지는 아이까지 받아낸다. 용팔은 매일 저녁 '물명주 석 자'라는 노래를 불러가며 자식을 두기 위하여 온 정성을 쏟았으나 그들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콩조지는 옥화의 몸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를 아무도 모르게 용팔의 집으로 가져간다. 콩조지와 옥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용팔 부부가 키우게 되지만, 그들은 그것이 누구의 씨인지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은 옥화도 마찬가지다. 옥화는 자기에게 임신을 시킨 사내가 누구이며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던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 채 똥례를 찾아와서 '해 뜨는 나라'로 가겠다고 말한다. 똥례는 자신이 시집올 때 입고 왔던 노랑저고리와 분홍치마를 옥화에게 입혀 주는데 옥화는 정말 '해 뜨는 나라'로 간 것인지 읍내에서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옥화가 사라지고 난 어느 날 영철은 노름판에서 딴 돈을 자루에 걸머지고 집으로 들어온다. 영철은 그 돈을 똥례에게 맡기면서 이제 한밑천을 잡았으니 노름에서 손을 떼겠다고 다짐한다. 영철은 그런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던 거였다.

 노름에서 손을 떼겠다고 생각한 영철은 이틀 만에 다시 노름방을 찾아간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잃고 나서 똥례가 보관하고 있던 돈까지 내어놓으라고 강요한다. 똥례가 말을 듣지 않자 폭행을 가하고, 화냥질을 했다는 누명까지 씌운다. 똥례는 실성한 채 시댁에서 쫓겨나 어디론가 떠나가려고 한다. 옥화가 갔다는 저 해뜨는 나라. 용팔은 실성한 채 어디로 떠나고 있는 똥례를 붙잡아 두지만 똥례는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용팔은 더 이상 똥례를 붙잡지 않는다. 저만큼 멀어져 가는 똥례를 향하여 잘 가라고 소리칠 뿐이다. 

 

 

영화 <糞禮記>, 1971 제작

 

 

 소설가 방영웅의 이 처녀작에는 작가의 체험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다. 작가의 고향 마을 또는 그와 이웃한 어디엔가 바로 똥례가 용팔이와 나무를 하러 다니고 영철에게 시집을 간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목할 것은 그러한 체험적 요소 자체라기보다 작가가 체험을 통해 접한 민중들의 삶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작가는 똥례를 비롯한 민중들의 삶을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원초적 생명력이 충만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 밥을 먹기 위해 일을 하듯, 똥, 오줌이 마려우면 배설을 하고, 성적인 욕구 역시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것이 민중들의 삶이며 그것이 바로 생명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본능적인 욕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여하고 즐기는 '상여 잔치'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에 순응하는 삶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민중적인 공동체 문화가 제시된다. 바로 이러한 면들이 작품 전체의 낙천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품 말미의 비극성에만 주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판단이 든다. 오히려 이 작품은 물질만능주의의 대표적 상징물인 '돈'과 '노름'의 파괴성을 드러냄으로써 민중들의 생명력과 건강성이라는 미덕을 강조하고자 했다고 봄이 옳을 듯하다.

 이 소설 『분례기』는 토착어의 사용, 속담 민요 등을 이용한 표현의 토착성을 유지하고 있다. 가령, "그러나 깐깐오월, 미끈유월이 되어도 누구네 집에서 혼인 말을 비치지도 않았고, 어정칠월, 동동 팔월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등의 표현에서와 같이 뚜렷한 역사적 배경이나 시대적 상황 없이, 누구나의 고향이 될 수 있는 가난한 시골을 묘사하면서, 드라마적 원색성, 간결한 문장, 대담한 성 묘사로써 작가 특유의 필력을 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