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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서정주 시집 『화사집(花蛇集)』

by 언덕에서 2013. 1. 21.

 

 

 

서정주 시집 화사집(花蛇集)

 

 

 

   


서정주(徐廷柱)의 첫 시집, 변형 A5판, 76면으로 1941년 남만서고(南蠻書庫)에서 간행하였다. 발행인은 오장환(吳章煥), 인쇄인은 조인목(趙仁穆)이다. 작자의 첫 시집으로 총 24편의 작품을 5부로 나누어 수록하였고, 말미에는 김상원(金相瑗)의 발문이 있다.

 표제시 <화사(花蛇)>를 비롯하여 <자화상(自畵像)><문둥이><대낮><맥하(麥夏)><입맞춤><가시내><도화도화(桃花桃花)><와가(瓦家)의 전설><수대동시(水帶洞詩)><봄><서름의 강물><벽(壁)><엽서><단편(斷片)><부흥이><정오의 언덕에서><고을나(高乙那)의 딸><웅계(雄鷄)(상)><웅계(雄鷄)(하)><바다><문(門)><서풍부(西風賦)><부활> 등 모두 24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정오의 언덕에서

 

보지마라 너 눈물어린 눈으로는……

소란한 홍소哄笑의 정오 천심에

다붙은 내입설의 피묻은 입마춤과

무한 욕망의 그윽한 이전율을……

 

아 ─ 어찌 참을것이냐!

 

슬픈이는 모다 파촉巴蜀으로 갔어도,

윙윙그리는 불벌의 떼를

꿀과함께 나는 가슴으로 먹었노라.

 

시약시야 나는 아름답구나

 

내 살결은 수피의 검은빛

황금 태양을 머리에 달고

몰약 사향의 훈훈한 이꽃자리

내 숫사슴의 춤추며 뛰여 가자

우슴웃는 짐생, 짐생 속으로

 

 

 

 

 이 시집에 수록한 시편들은 1935년에서 1940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서정주의 초기 시에 해당한다. “우리들의 중심과제는 ‘생명’의 탐구와 이것의 집중적 표현에 있다.”라고 시인부락 동인시절을 회고한 서정주 자신의 말과도 같이, <화사집>의 시편들은 인간의 숭고한 생명상태를 노래한 것이다.

 

 

 

 

 서정주의 시는 크게 초기ㆍ중기ㆍ후기로 나뉘는데, 이 시집은 두 번째 시집인 <귀촉도(歸蜀途)>(1948)와 함께 초기의 작품경향인 토속적인 분위기와 원초적인 이미지가 기조를 이루는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이 특징이다. 특히 <자화상><화사><문둥이> 등의 시는 인간의 원죄 의식과 관능적인 생명력을 물씬 느끼게 한다.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시건설](1937) -

 

 이와 함께 시집에는 서정주의 신춘문예 등단작품인 시 <벽>(1936)의 테마, 즉 '벽에 갇힌 자의 어둠'이 깊이 잠재되어 있다. 시집 서두에 나오는 <자화상>의 '애비는 종이었다'에서 '종'이라는 아버지의 신분은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의 식민지적 현실과 깊은 관련이 있고, 참다운 인식을 갈구하는 젊은 시인의 욕망은 식민지라는 벽에 갇혀 있음으로 해서 더욱 강한 에너지가 되어 맹목적이며 원초적인 생명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서정주 초기 시의 가장 특징적인 경향이며 <화사>를 자신의 처녀작으로 여기고 시집의 표제로 삼은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서두의 시 <자화상>은 자전적인 시로서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병든 수캐마냥 헐덕어리며” 스물세 해 동안을 바람 속에서 자라왔다는 것을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종의 아들’이라는 굴욕감과 바람 속에서 살아온 유랑의 생활, 죄인이나 천치 등은 모두 현대인의 비극적 상황을 상징한다.

 그리고 대표작의 하나인 <화사>는 꽃뱀을 통하여 생명의 근원을 탐구하고 내면화한 작품으로서 여기에서의 꽃뱀은 시인 자신의 ‘존재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보들레르(Baudelaire,C.P.) 등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과 같은 서구적인 표현 형태를 실험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 [시인부락] 2호(1936.12) -

 

 한마디로 <화사집> 전편에 나타난 시적 특징은 치욕과 천치와 마약과 나체 등으로 표현된 강렬한 생명을 그 어떤 윤리적ㆍ도덕적인 제약을 받지 않고 정욕과 육체의 백열상태(白熱狀態)로 끌어올렸다는 점에 있다.

 이 책을 발간할 당시 미당은,  "내가 붓을 든 이후(以後)로 지금에 이르도록 가장 두려워하고 끄-리든, 이 시편(詩篇)을 다시 내 손으로 모아 한 권 시집(詩集)으로 세상(世上)에 전(傳)하려 한다. 아- 사랑하는 사람의 재(災)앙 됨이어!" 하며 발간 의의를 다지기도 했다.  

 

 

문둥이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 [시인부락] 창간호(1936. 11) -

 

 1935년부터 4년 동안 쓴 시들 중 선별해서 묶은 이 시집은 ‘화사’ ‘맥하’ ‘입맞춤’ ‘가시내’ ‘대낮’ 등 관능적이고 본능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작품을 여러 편 선보이고 있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서정주의 대표시 ‘자화상’도 수록했다. 화사집의 초판본 가격은 5원이었는데 당시 화폐 가치를 고려해보면 비싼 값이었다고 한다. ‘시인부락’의 동인이자 당시 남대문 약국의 주인이었던 김상원이 500원을 내놓은 덕분에 초판집을 만들 수 있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