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시집 『이 시대의 사랑』
1981년 등단작으로 처녀 시집의 제목을 삼은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 시인 최승자(1952 ~ )는 정통적인 수법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뜨거운 비극적 정열을 뿜어 올리면서 이 시대가 부숴뜨려온 삶의 의미와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향해 절망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 이 호소는 하나의 여성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자유로움을 위한 언어적 결단이기도 하다.
삼 십 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뜨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희잔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1981)-
초기시에서, 뜨거운 비극적 정열을 통해 타자를 향한 열린 세계를 갈망하던 시인은 이 시집에서 그 열린 정신이 열린 마음과 열린 몸으로 변모하는 과정의 고통스러움과 눈물겨움을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상상력을 통해 보여준다.
또한 세상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된 자아의 밀폐된 내면세계를 파격적인 이미지로 드러내면서 마침내 세상과 화해할 길을 모색하고 있다.
최승자의 시는 삶에 대한 절망의 언어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 그 자체로의 깊은 함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통하여 더욱 강한 삶의 의지를 말하고자 하는 시적 의지를 담고 있다.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에서는 이 시대가 파괴해 버린 삶의 의미를 천착하면서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향해 절망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 이 호소는 하나의 여성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자유로움을 위한 언어적 결단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1984)에서는 극한적인 상황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찬란히 빛을 발하는 삶의 비극성을 그려낸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개같은 가을이
개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업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1981)-
삶에 대한 철저한 긍정에 도달하기 위해 세계 전체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수행하는 최승자의 시작 방식을 두고 ‘방법적 절망’이라 평하기도 한다. 인간과 희망과 사랑에 대해 ‘전체 아니면 무’라는 비극적 전망을 궁극에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다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이로운 시 세계를 일궈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3시집 <기억의 집>(1989)에서는 ‘시를 씀으로써 시를 극복한다’는 또 하나의 역설적 전략을 만들어 낸다. 시로 인하여 알게 된 세상의 극한적인 절망을 견뎌 내고 그 속에서 시를 만들어 내는 동력을 다시 ‘시 쓰기’를 통해 확보하는 시인의 전략은 진정한 ‘강함’과 ‘희망’을 희구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절망에 대한 찬란한 수사와 역설적인 열정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를 아울러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일찍이 나는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 당신, 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1981)-
1980년대에 최승자의 출현은 현대 여성시에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여성시'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그의 시에 이르러 여성시와 남성시의 구분이 없어졌다고. 그의 시적 발언은, 전통적 여성시의 곱고 여린 감수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과감하게 단언하고, 잔인하게 폭로한다. 이 시는 최승자 식 발언의 파괴력을 잘 보여주며, 그의 시, 나아가 그의 삶이 근거하는 인식의 저변을 요연하게 보여준다.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 시간적 연원은 `일찍이'라는 부사의 힘을 빌어 훌쩍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전생은 애초부터 `마른 빵에 핀 곰팡이',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힌 천년 전에 죽은 시체' 등의 비유적 매개들이 보여주듯 아주 하찮고 지저분한 어떤 것이었던 것이다. 지난 날 `아무 부모도 나를 키우지' 않았으며, 지금은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1981)-
시인 최승자는 1952년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났다. 수도여고와 고려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했으며, 계간〈문학과 지성〉에 「이 시대의 사랑」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최승자는 현대 시인으로는 드문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2001년 이후 투병을 하면서 시작 활동을 한동안 중단했으며 2006년 이후로 요양하다 2010년, 등단 30주년 되는 해에 11년의 공백을 깨고 신작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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