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시적 대상의 안팎을 헤아리는 섬세한 시선과 결 고운 시어로 무르익은 시의 아름다움을 한껏 전하는 김사인(金思寅.1956.3.30∼ )의 두 번째 시집으로 2006년 출간되었다. 시인은 이 시집으로 제14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가만히 좋아하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 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이 시집에는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노숙] [코스모스] 등 67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시인은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가녀린’ 것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 세상살이의 쓰라림에 공명하는 진실한 마음이 절묘한 시어와 고즈넉한 어조에 실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 아름다움과 슬픔을 시적 풍경으로 형상화한다.
필사적으로
비 오고, 술은 오르고, 속은 메슥거려 식은 땀 배고, 비는 오는데, 어디 마른 땅 한 귀퉁이 있다면 이 육신 벗어졌으면 좋겠는데, 어쩌자고 눈앞은 자꾸 아련해지나, 양손에는 우산과 가방 하나씩 쥐고, 자꾸 까부라지려 하네, 비는 오고, 오는데, 몸뚱이는 젖은 창호지처럼 척척 늘어지는데, 기억에도 흐릿한 옛 벗들 그림자, 환등(幻燈)과도 같이, 가슴에 예리한 칼금 긋고 지나가네. 한 손에 우산, 또 한 손엔 내용 불상의 가방을 쥐고 필사적으로, 달리 마땅한 폼이 없으므로 다만 필사적으로, 신발에 물은 스미고, 신호는 영영 안 바뀌는데.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시의 대상과 하나 되어 그의 말을 받아내려는 지극한 정성이 시 한편 한편마다 웅숭깊은 울림으로 남는 시집이다. “너무 슬프고 너무 아름답다”고 신경림 시인의 추천사는 전한다.
노숙(露宿)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 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은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시인ㆍ평론가인 김사인은 충북 보은 출생으로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82년 동인지 [시와 경제]에 참여하여 시를 썼으며, 그 해 <한국 문학의 현 단계>(창작과비평사)에 평론 <지금 이곳에서의 시>를 발표하면서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빈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 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 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코스모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노동해방문학지 사건으로 한때 수배되기도 했으며, 민족작가회의 이사, 민족문화연구소 부소장, [노동해방문학] 발행긴 등 역임. 불교방송 심야프로 <살며 생각하며>를 여러 해째 진행 중이며,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신동엽창작기금(1987), 제50회 현대문학상(2005), 제14회 대산문학상(2006)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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