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첫 시집.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는 상징적인 시구로 한 시대의 아픔을 대변했던 이 책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뭉클하게 다가가면서 한 시대의 정신이 됐다. 민중의 생활어로 씌었으나 '지식인 시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닿을 수 없는 지점에 이미 도달해 있는 것처럼 보였던'(경향신문) 이 시집은 '한국 문학사상 단일 시집 중 가장 많은 노래를 낳은 시집'(음악평론가 강헌)이 되었으며,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불가피한 하나의 지침이 되기도'(시인 고은) 하였다.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박노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산업 현장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일상적인 노동 체험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낸 시인이다. '노동 해방'의 약자인 '노해'를 그의 필명으로 삼은 그는 노동운동사상 '전태일' 이후 노동자의 대표적 상징체이기도 하다. 그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급속히 독자층을 확대해 나감으로써 1980년대 노동문학, 혹은 노동자 문학의 활성화에 불을 당긴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 후 소위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공식적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1988년 제1회 노동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노동의 새벽'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작품이다. '현장적 구체성', '체험의 진실성', '최고 수준의 정치적 의식과 예술적 형상화 능력' 등의 말로 칭송받았던 이 시집의 작품들은 지식인의 관념이 아닌, 노동자의 노동 현장의 일상적 삶이 노동자의 언어로 형상화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에게 있어 현실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에 의한 부정의 대상이었다.
박노해의 시집을 지금 읽어보면 당시 던진 충격은 많이 완화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박노해씨의 뒤를 잇는 여러 노동자 시인들의 시에 우리가 익숙해진 데다, 창작 주체에 관한 강박에서 벗어나 박노해 시의 성취와 한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의 새벽' 출간 이후 박노해는 흔히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렸다. `1956년 전남 출생, 15살에 상경하여 현재 기능공'이라는, 시집 갈피의 간략한 소개말고는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은 `박노해'라는 이름이 노동시를 쓰는 창작집단이 편의상 내세운 공통의 필명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세상의 호기심과 상상에는 아랑곳없이 박노해는 새로 창간된 격월간 <노동해방문학>에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문 형태파괴적인 `시사시(時事詩)'들을 선보이는가 하면, 남북노동자회담 제안, 현대자동차 파업 격려, 문익환 목사 방북 환영 등의 시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이제 노동자 시인에서 노동운동가이자 혁명가로 변신하는 듯했으며, 그의 행보에 대한 관심과 열광은 `박노해 현상'이라는 조어를 낳았다.
노동의 새벽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 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시다의 꿈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밋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둑 잘라
피 흘리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밀려오는 온 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림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바람 지는 공단거리를
휘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가리봉 시장
가리봉 시장에 밤이 깊으면
가게마다 내걸어 놓은 백열전등 불빛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긴 노동 속에 갇혀 있던
우리는 자유로운 새가 되어
이리 기웃 깔깔거리고
껀수 찾는 어깨들도 뿌리 뽑힌 전과자도
몸부벼 살아 가는 술집 여자들도
눈을 빛내며 열이 오른다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리봉 시장을 찾아
친한 친구랑 떡볶기 500원어치, 김밥 한 접시,
기분나면 살짜기 생맥주 한 잔이면
스테이크 잡수시는 사장님 배만큼 든든하고
천오백원짜리 티샤쓰 색깔만 고우면
친구들은 환한 내 얼굴이 귀티 난다고 한다
하루 14시간
손발이 퉁퉁 붓도록
유명 브랜드 비싼 옷을 만들어도
고급 오디오 조립을 해도
우리 몫은 없어,
우리 손으로 만들고도 엄두도 못내
가리봉 시장으로 몰려와
하청공장에서 막 뽑아낸 싸구려 상품을
눈부시게 구경하며
이번 달엔 큰맘 먹고 물색 원피스나
한 벌 사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앞판 시다 명자는 이번 월급 타면
켄터키치킨 한 접시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고
마무리 때리는 정이는 2,800원짜리
이쁜 샌달 하나 보아둔 게 있다며
잔업 없는 날 시장 가지고 손을 꼽는다
가리봉 시장에 밤이 익으면,
피가 마르게 온 정성으로
만든 제품을
화려한 백화점으로,
물 건너 코큰 나라로 보내고 난
허기지고 지친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싸구려 상품을 샘나게 찍어 두며
300원어치 순대 한 접시로 허기를 달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포장마차
모래에 싹이 텄나
사장님이 애를 뱄나
이 좋은 토요일 잔업이 없단다
이태리타올로 기름낀 손을 닦고서
작업복 갈아입고 담배 한 대 붙여 물면
두둥실 풍선처럼 마음이 들떠
누구라 할 것 없이 한잔 꺾자며
공장 뒷담 포장마차 커튼을 연다
쇠주파 막걸리파 편을 가르다
다수결 두꺼비로 통일을 보고
첫딸 본 김형 추켜 꼼장어 굽고
새신랑 정형 얼러대어
정력에 좋다고 해삼 한 접시
자격증 시험 붙어 호봉 올라간
문형이 기분 조오타고 족발 두 개 사고
걸게 놓인 안주발에 절로 술이 익는다
새벽에 안서는 놈은 빚도 주지 말랬는데
잔업에 곯다 보니 요개 새벽까지 기척도 안해
일주일째 아내 고것 곰팡이 슬겠다고
킬킬거리고, 이제 신혼 한달째인
정형 새신부 토실한 히프 모양이 첫아들 날 상이라며
좌우삼삼 일십구천 김형 5단계 노하우 전수에
헤 벌리는 놈, 심각한 놈, 키득대는 놈,
한 잔 두 잔 술잔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녹아들어 하나가 되어
송형은 문형에게 감정풀이 화해주를 청하고
서씨는 전기과 박형과 찜찜했던 오해를 털어놓고
노씨는 왕년에 광빨나던 시절 타령이 시작되고
장단맞추는 김형, 만주에서 개장수하며 독립운동하던
뺑까는 야화가 기세를 올리면 부산 자갈치 공형,
야야 치라 치라 벌써 백번째다 마
내 한 곡 뽑제, 니 박수 안치나
두만강을 노저어 오륙도 돌아
개나리처녀 미워미워
울고 넘는 박달재로 발길을 돌려
젓가락 두들기며 주전자뚜껑 드럼에도
어깨 우쭐, 방뎅이 들썩,
쿵다라 닥닥 조코 좆커
영자야 안주 한 사라 더 주라 잉
2차 가자 집에 가자 고고장 가자는 걸
알뜰꾼 신씨가 눌러앉히고 한 병 두 병 더할수록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
좆같은 노무과장, 상무새끼, 쪽발이 사장놈,
노사협의회 놈들 때려엎자고
꼭 닫아둔 울화통들이 터져나온다
문형은 간신자식들 먼저 깨야 한다며
벌겋게 달아오르고
정형은 단계적으로 구내식당부터
시정하자고 나직이 속삭인다
상고 나와 기름쟁이 된 회계담당 김형은
외상장부 넘겨 가며
계산을 한다
냉수 한 사발 돌려 마시고
자욱한 연기 속 포장마차 나서면
어깨를 끼고 비틀비틀
일렬횡대로 서 담벽에 오줌 깔기고
씨팔, 내일도 휴일특근 나온다며
리어카장수 떨이쳐 딸기 천원어치씩
옆주머니에 꿰차고
작별의 손 흔들며 잔업 없는 오늘만은
두둥실 토요일 밤을 흥얼거리며
아내가 기다리는 집을 향한다
-시집 <노동의 새벽>(풀빛,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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