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아름다운 서정 『마종기 시전집』
마종기(1939 ~ )는 일본 도쿄 출생으로 아버지는 아동문학가인 마해송이며, 어머니는 한국여성 최초의 서양무용가인 박외선이다. 이러한 부모로부터 문학적 자질을 물려받았으며 어릴 적부터 풍부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서울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시의 마이매미 밸리 병원에서 인턴, 오하이오 의과대학 방사선과 조교수 겸 방사선 동위원소 실장, 오하이오 의대 소아과 임상 정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오하이오 아동병원 초대 부원장 겸 방사선과 과장으로 일하였다.
우화의 강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든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 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시집 <그 나라 하늘빛>(1991)
1959년 시 <해부학교실(解剖學敎室)> 등으로 [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아 등단한 이후 1960년 첫시집 <조용한 개선>을 발간하였다. 1968년에는 김영태, 황동규와 함께 3인 시집 <평균율 1>을, 1972년에는 <평균율 2>를 출간하였다.
자연스럽게 문인의 길로 접어드는 듯 했으나 어려운 고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주위의 권유로 연세대학교 의대에 진학했다. 1959년 본과 일학년때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면서 ‘의사시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 병원에서 수련의 시절을 거쳐 미국 진단방사선과 전문의가 되었고, 오하이오 의과대학 방사선과 및 소아과 교수 시절에는 그해 최고 교수에게 수여하는 ‘황금사과상’을 수상했다. 이후 톨레도 아동병원 방사선과 과장, 부원장을 역임했고 2002년 의사생활을 은퇴할 때까지 ‘실력이 뛰어나고 인간미 넘치는 의사’로서 명성을 쌓았다.
연가(戀歌)4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들꽃이 되어
이 바다 앞에 서면
나는 긴 열병 끝에 온
어지러움을 일으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망각의 해변에
몸을 열어 눕히고
행복한 우리 누이여.
쓸려간 인파는
아직도 외면하고
사랑은 이렇게
작은 것이었구나.
- 시집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비채 刊)>
그의 시는 시인으로서는 희귀한 의사의 체험과 외국 생활이 기본 모티프가 된다. 삶과 죽음을 다루는 의사가 겪는 격렬한 체험들을 아름답고 따뜻한 서정으로 수용하여 맑은 지성과 세련된 언어로 승화시키고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꾸준히 모국어에 의한 시작활동을 계속하였다.
한국문학작가상(1976), 미주문학상(1989), 제7회 편운문학상(1997), 제9회 이산문학상(1997), 제16회 동서문학상(2003), 제54회 현대문학상(2008) 등을 수상하였다.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그의 시는 초기의 소란한 서정에서 출발하여 점차 의사(醫師)로서의 삶과 이국(異國)에서의 삶에서 오는 인간 통찰의 세계로 바뀌었다. 그것은 타인의 병(病)과 아픔과 죽음을 대하는 의사의 괴로운 깨달음과 이국에서 조국을 보는 시인의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복합된 세계이다.
그 복합된 세계가 아직 잃지 않고 있는 초기시의 단순성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그의 시에 힘을 부여하는 근거라 할 수 있다.
방문객
무거운 문을 여니까
겨울이 와 있었다.
사방에서는 반가운 눈이 내리고
눈송이 사이의 바람들은
빈 나무를 목숨처럼 감싸안았다.
우리들의 인연도 그렇게 왔다.
눈 덮인 흰 나무들이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질긴 길은 지워지고
모든 바다는 해안으로 돌아가고
가볍게 떠올랐던 하늘이
천천히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방문객은 그러나, 언제나 떠난다.
그대가 전하는 평화를
빈 두손으로 내가 받는다.
―시집 ‘이슬의 눈’(문학과지성사)
고국을 떠나 이국에서 보내야했던 그리움과 고독의 시간을 자신만의 시어로 조탁하여 『조용한 개선』을 시작으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그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우리는 서로를 부르는 것일까』등 수많은 시집을 펴냈다. 2009년에는 시 「파타고니아의 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매년 봄과 가을 고국을 방문해 연세대학교의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머지않아 ‘고국의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맞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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