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 시집 『오랑캐꽃』
이용악(李庸岳: 1914 ~ 1971)의 세 번째 시집으로 B6판. 94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1947년 4월 아문각(雅文閣)에서 그 초판이 간행되었다. 책 끝에 저자의 발문(跋文)으로 「‘오랑캐꽃’을 내놓으며」가 있고 총 29편의 작품을 8부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다. 제1·5·8부에는 「오랑캐꽃」·「절라도 가시내」·「항구에서」 등을 각각 한 작품씩 싣고, 나머지 제2부에는 「불」·「밤이면 밤마다」 등 8편, 제3부에는 「꽃가루 속에」·「버드나무」 등 5편, 제4부에는 「벽을 향하면」·「다시 항구에 와서」 등 4편, 제6부에는 「두메산곬 1∼4」, 제7부에는 「슬픈 사람들끼리」·「뒤ㅅ길로 가자」 등 5편을 각각 수록하고 있다.
오랑캐꽃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고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께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인문평론](1940. 10) -
이 작품은 1940년 10월 [인문평론]에 실렸던 작품이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35년 [신인문학] 3월호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으며, 해방 후 좌익운동에 가담, 활동하다가 월북했다.
이 시인의 고향은 함북 경성이다. 시인은 먼 옛날 오랑캐(여진족)가 고려와의 싸움에서 무참히 패주해 간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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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의 <국경의 밤>에 등장하는 '순이'가 바로 그런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인데 이용악의 <오랑캐꽃>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이들을 통해 두 시인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채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 민족의 당대적 현실 상황을 암유(暗喩)하고 있다. 원래 오랑캐꽃은 북방 오랑캐의 혈통이나 관습과는 관계없는 야생의 꽃이다(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장수꽃 또는 제비꽃이라고 한다).
결국 시인은 처음에는 오랑캐와 오랑캐꽃을 동일 선상에 놓고 그 의미를 역사적으로 조명하였지만, 얼마 안 가서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먼 옛날 고려 즉, 우리 민족에 의하여 쫓겨 간 오랑캐(여진족)의 모습이 오늘에 와서 상황이 반전된 우리 민족의 모습과 묘하게 대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일제의 혹독한 압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정든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유랑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 준 시다.
전라도 가시내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네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리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 줄게.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오랑캐꽃>(아문각,1947)-
저자는 여기에 모은 시편들이 모두 자신의 두 번째 시집인 『낡은 집』(삼문사, 1938) 이후, 그러니까 1939∼1942년까지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된 작품들이라 하고 있으나, 광복 후에 발표된 것도 몇 편 있다.
원래 이 시집은 1942년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간행하려다가 내지 못하고, 그 이듬해 봄에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북도 경찰부에 원고를 송두리째 빼앗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8·15광복 이후 그것들을 신석정(辛夕汀)·김광현(金光現)·유정(柳呈) 등이 다시 수집하여 출간했다.
버드나무
누나랑 누이랑
뽕오리 따러 다니던 길가엔
이쁜 아가씨 목을 맨 버드나무
백 년 기다리는 구렝이 숨었다는 버드나무엔
하루살이도 호랑나비도 들어만 가면
다시 나올 성싶잖은
검은 구멍이 입벌리고 있었건만
북으로 가는 남도치들이
산길을 바라보고선 그만 맥을 버리고
코올콜 낮잠 자던 버드나무 그늘
사시사철 하얗게 보이는
머언 봉우리 구름을 부르고
마을선
평화로운 듯 밤마다 등불을 밝혔다
-<오랑캐꽃>(어문각,1947)-
수록한 시편들의 특색은 시집 『분수령(分水嶺)』이나 『낡은 집』에 실린 초기 시편들의 투박함이나, 사상성보다는 잘 다듬어진 언어의 기교(技巧)에 있다. 그러나 이런 언어적 기교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당대 사회현실로서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비분(悲憤)을 안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수록한 시편 중에서 「오랑캐꽃」과 「절라도 가시내」는 이용악의 대표작이 되고 있는 바, 유이민(流移民)의 망국적 비애와 궁핍화(窮乏化) 현상을 주제로 하고 있다.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붙은 섣달 그믐
밤이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붙나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 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 어머닌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주셨지.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잘들 때꺼정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감을 때까정.
다시 내게로 헤여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개야 귀성스럽다.
가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날고 싶어 날고 싶어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 곳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껍다.
등대와 나와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기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가도오도 못할 우라지오.
-<오랑캐꽃>(어문각,1947)-
☞이용악(李庸岳.1914.11.23∼1971?) 시인. 함북 경성군(鏡城郡) 출생. 일본 도쿄(東京) 상지(上智)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재학 중 [신인문학(新人文學)] 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 문단에 등단했다. 김종한(金鍾漢)과 함께 동인지 [이인(二人)]을 발간했고, [인문평론(人文評論)]지의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초기의 시 가운데 <북국의 가을><오랑캐꽃> 등은 대체로 모더니즘적 취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뛰어난 감각적 이미지의 구사에도 불구하고 그 예술적 형상이 단편적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눈 나리는 거리에서><슬픈 사람들끼리> 등의 '이야기 시'가 가진 매력은 당시 조선민중의 삶을 압박하는 정치ㆍ경제적 고통을 구체적인 경험에 긴밀히 관련시켜 하나의 분명한 예술적 형상, 또는 문학적 전형을 창출해 보이는 데서 찾아진다. 8ㆍ15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맹원으로 활약하다가 군정당국에 의해 수감되었고, 6ㆍ25전쟁 중에 월북했다. 그는 월북 후 1960년대 초반 [조선문학] 부주필을 그만둔 뒤 평양시 창작실에 근무하며 창작에 전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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