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시집 감상

미당 서정주 세 번째 시집 『서정주 시선』

by 언덕에서 2013. 9. 9.

 

 

미당 서정주 세 번째 시집 『서정주 시선

 

 

 

 

 

1956년에 간행된 『서정주시선』에서는 「풀리는 한강 가에서」, 「상리과원」 등의 작품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한과 자연과의 화해를 읊었고, <학>, <기도> 등의 작품에서 원숙한 자기 통찰과 달관을 보여주고 있다. 서정주의 시는 <신라초>에 이르면서 새로운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초월적인 비전의 신화적인 거점이 되고 있는 신라는 역사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상의 고향과도 같다. 서정주는 <신라초>에서 불교사상에 기초를 둔 신라의 설화를 제재로 하여 영원회귀의 이념과 선(禪)의 정서를 부활시켰던 것이다.

 

 

상리과원(上里果園)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漢江水)나 낙동강(洛東江) 상류와도 같은 융륭(隆隆)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굴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즐거운 웃음판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트리는 몸뚱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패기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쁜 꽃송아리들을 달았다. 멧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새끼들이 조석(朝夕)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 만 마리의 꿀벌들이 왼종일 북치고 소고치고 마짓굿 울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當然)한 일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묻혀서 누워 있는 못물과 같이 저 아래 저것들을 비취고 누워서, 때로 가냘프게도 떨어져 내리는 저 어린것들의 꽃잎사귀들을 우리 몸 위에 받아라도 볼 것인가. 아니면 머언 산(山)들과 나란히 마주 서서,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 분면(油頭粉面)과, 한낮의 춤과, 황혼의 어둠 속에 이것들이 잦아들어 돌아오는 아스라한 침잠(沈潛)이나 지킬 것인가.

 

 하여간 이 하나도 서러울 것이 없는 것들 옆에서, 또 이것들을 서러워하는 미물(微物) 하나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섣불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설움 같은 걸 가르치지 말 일이다. 저것들을 축복(祝福)하는 때까치의 어느 것, 비비새의 어느 것, 벌 나비의 어느 것, 또는 저것들의 꽃봉오리와 꽃송아리의 어느 것에 대체 우리가 항용 나직이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란 것이 깃들이어 있단 말인가.

 

 이것들의 초밤에의 완전 귀소(完全歸巢)가 끝난 뒤, 어둠이 우리와 우리 어린것들과 산과 냇물을 까마득히 덮을 때가 되거든, 우리는 차라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 곳의 별을 가리켜 보일 일이요,

제일 오래인 종(鐘)소리를 들릴 일이다.


 - [현대공론](1954년 11월호) -


 

 

 

 

 서정주는 초기에는 대지적 존재로서 인간의 조건과 본능의 몸부림을 보들레르적 탐미주의로 승화시키려 했으나 이의 한계를 깨닫고 곧 동양의 영원주의로 회귀한다. 중기 이후에 그가 몰두했던 신라정신과 신화 혹은 설화적 세계는 바로 그의 이와 같은 정신편력을 보여주는 것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상상력과 뛰어난 언어의 감수성이 빚어낸 작품의 문학적 완결성이라 할 것이다. 서정주의 시 세계는 전통적인 서정세계에 대한 관심에 바탕을 두고 토착적인 언어의 시적 세련을 달성하였다는 점, 시 형태의 균형과 질서가 내재된 율조로부터 자연스럽게 조성되고 있는 점등이 커다란 성과로 평가된다.

 

 

풀리는 강가에서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럭이같이

서리 묻은 섯달의 기럭이같이

하늘의 어름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했더니


무어라 이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밈둘레나 쑥니풀 같은것들

또 한번 고개숙여 보라함인가

황토 언덕

꽃 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번 더 바래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 <서정주시선, 1956>

 

 

 

 

 

 그는 한용운(韓龍雲)과 함께 불교에서 시적 영감을 얻은 대표적 시인이다. 그의 초기 시에는 불교적인 달관이 거의 보이지 않고, 식민지 치하의 그 어떤 시인들보다 더 절실하게 억눌린 정신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자화상<은 신분이라는 그의 정신적 갈등을 식민지 치하의 한국민 전체의 그것으로 폭 넓게 일반화시킴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감각적 경험 속에 모순의 요소가 들어 있음을 깨닫고 추한 것 속에서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것 속에서 추함을, 선 속에서 악을, 그리고 악한 것 속에서 선함을’ 본다는 보들레르적인 어휘로 표현되어 있다.

 

 

기도


저는 시방

꼭 텡 비인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텡 비인 들녘 같기도 합니다

주여 (이렇게밖엔 당신을 부를 길이 없습니다)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두시든지

몇 마리의 나비를 주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자기와 같이하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시방 제 속은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워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 <서정주시선, 1956>

 

 그는 자신의 육체의 추함을 쾌감과 동시에 느끼고 그것을 자신을 포함한 한국인의 그것으로 폭 넓게 확산시켰다. 그의 초기의 정신적 갈등은 관능에 의해서 그 탈출구를 얻게 된다. 그 관능은 비윤리적인 행위에 의해 발산되어 처절한 웃음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착란으로 치닫지 않고 절제와 달관으로 가득 차게 된다.


立春 가까운 날

 

솔나무는 오히려 너같이 젊고

스무날쯤 있으면 梅花도 핀다.

千年 묵은 古木나무 늙은 흙우엔

蘭草도 밋밋이 살아 나간다.


- <서정주시선, 1956>


 그가 발견해 낸 유일한 방법인 정신주의는 그를 삶의 현장에서 비켜서게 하고, 신비주의와 안일주의와 결합하게 만든다. 그것은 ‘신라’ 또는 ‘질마재’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며, 그의 ‘신라’는 따라서 동양적인 일원적 평화를 상징하는 그의 상상적 고향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불교적인 인연설화에 의해 설명되고 부연되어 모순이 없고 조화와 평화가 주어져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