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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신라 악성(樂聖) 우륵

by 언덕에서 2012. 11. 17.

 

신라 악성(樂聖) 우륵

 

 

 

 

가야와 신라의 음악가. 우륵은 대가야 가실왕의 명에 따라 가야국의 궁중 악사가 되어 예술을 통해 혼란스러운 가야국의 정치적 통합을 꾀하고자 했던 악성(樂聖)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시대적 상황 탓에 순탄하지 않았다. 조국인 가야국이 멸망하게 되자 신라로 투항하였고, 여러 난관 속에서 신라 진흥왕의 신임을 얻어 신라 음악의 발전을 이뤄낸 인물이다.

 우륵은 490년경 대가야의 직할 현인 성열현에서 태어났다. 우륵의 고향인 성열현은 정치·문화적으로 발달된 지역이었고, 중앙 세력 즉 대가야의 왕명이 직접 하달되는 곳이었다. 성열현이 현재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대구시 동구 불로동 일대, 고령군 고령읍 쾌빈리 일대 등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우륵을 발탁한 인물은 대가야의 가실왕(嘉悉王)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열현의 악사(樂師) 우륵이 가실왕의 부름을 받고 대가야의 왕경으로 입경하였다고 한다. 이때가 520년 초반으로 그의 나이 30대였다.

 대가야의 가실왕이 우륵을 발탁한 것은 대가야가 처해있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5세기 후반의 대가야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6세기에 들어와 섬진강 유역에 대한 백제의 공세가 강화되어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실왕은 신진세력을 발굴하여 중앙 정계를 개편하고 대외적으로 신라와의 동맹을 추진하여 백제의 공세에 맞서고자 했다. 이때 가실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 세력 기반이 필요했고, 이를 대표한 인물이 우륵이었다.

우륵 하면 떠오르는 악기가 가야금이다.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만들었고, 우륵이 12곡을 지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야금은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본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가야금은 완전하게 독창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가실왕은 가야금을 제작할 때 중국의 악기 제도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의 것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가야국의 정신이 담긴 독특하고 유일한 가야금을 만들었다.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전하나, 우륵이 직접 제작에 관여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가야금의 외관은 가야의 천문관이 반영되어 있다. 가야금의 모양에서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天圓)하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地方)한다고 한다.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六合)을 본받고 열두 개의 줄은 1년 12개월을 상징하였다.

 천원지방과 1년 12개월이라는 천문관은 곧 왕권을 상징한다. 가야금은 악(樂)으로서 백성을 통치하고자 하는 유교적 예악(禮樂) 관념이 바탕이 된 것이다. 삼국 중에서 가야금이 가야에서 처음 만들어진 사실은 가야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게 해 준다.

 

 

 당시 가야금 곡조에는 모두 185곡이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우륵이 지은 곡이 12곡, 우륵의 제자 니문이 지은 곡이 3곡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의 제목은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이, 사물, 물해,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등 가야의 지역명이었다. 이 지역들은 대가야연맹을 형성했던 소국이거나, 국방상 주요 거점 지역으로 추정된다. 당시 가야국의 불교행사 혹은 국가행사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우륵이 지은 12곡은 1년 12달에 맞추어 상징화한 국가 예악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륵은 신라로 망명할 때 가실왕과 함께 만든 ‘가야금’을 가지고 갔다. 대가야 출신에다가 가실왕의 정치적 개혁을 도운 우륵이 처음부터 신라의 환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가야에서 만든 12곡이 신라에서 환영받을 수는 없었다. 결국, 우륵은 신라의 입장에 맞게 12곡을 5곡으로 줄여 새롭게 편곡할 수밖에 없었다.

 우륵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진흥왕이었다. 신라는 우륵을 통해 대가야의 음악을 수용했다. 물론 신라의 토속 음악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신라는 정치적 통합을 노래하는 유교적 선진 음악을 전수받은 것이었다. 진흥왕은 우륵의 음악을 국가 대악(大樂)으로까지 삼았다.

 이제 신라 음악은 더 이상 일상을 노래하는 가요가 아닌, 선왕의 덕을 드러내고 세상을 경계하는 세련된 ‘아(雅)’의 음악으로 전환하였다. 신라는 가야국의 대표 악기인 가야금을 통해 신라의 예술을 승화시켰다. 악성 우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야금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제대로 이어진 것은 우륵과 가실왕, 그리고 진흥왕의 공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