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시인은 변심한 꽃에게 어제의 그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 입술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따진다. 그 사랑은 오늘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꽃의 사랑은 거짓이었다고 탓한다. 다 쓰고 나서 한 줄 끼워 넣는다.
'꽃아, 그래도 또 오너라'
문정희 시인(1947 ~ )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 진명여고 재학 중 백일장을 석권하며 주목을 받았고, 여고생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첫 시집 『꽃숨』을 발간했다.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문학 포럼에서 작품 「분수」로 〈올해의 시인상〉(2004), 2008년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문학 부문 등을 수상했다.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로 문단과 독자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시대 대표 여류시인이다.
러브호텔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 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들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문정희 시인은 1996년 미국 Iowa대학(IWP) 국제 창작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영어 번역시집 『Windflower』, 『Woman on the Terrace』, 독어 번역시집 『Die Mohnblume im Haar』, 스페인어 번역시집 『Yo soy Moon』, 알바니아어 번역시집 『kenga e shigjetave』, 『Mln ditet e naimit』외 다수의 시가 프랑스어, 히부르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문정희시집』, 『새떼』,『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찔레』, 『하늘보다 먼곳에 매인 그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지금 장미를 따라』『사랑의 기쁨』 외에 장시 「아우내의 새」등의 시집이 있다.
지는 꽃을 위하여
잘 가거라, 이 가을날
우리에게 더 이상 잃어버릴 게 무어람
아무 것도 있고 아무 것도 없다
가진 것 다 버리고 집 떠나
고승이 되었다가
고승마저 버린 사람도 있느니
가을꽃 소슬히 땅에 떨어지는
쓸쓸한 사랑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른 봄 파릇한 새 옷
하루하루 황금 옷으로 만들었다가
그조차도 훌훌 벗어버리고
초목들도 해탈을 하는
이 숭고한 가을날
잘 가거라, 나 떠나고
빈들에 선 너는
그대로 한 그루 고승이구나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는 2001년 (주)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는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래 30년이 넘는 창작 생활 동안 서른 권에 가까운 저서를 펴내는 등 풍요로운 집필 이력을 지닌 대표적인 중견 시인으로, 이 시집은 1996년에 출간한 『남자를 위하여』(민음사) 이후 지난 5년 동안 쓴 시들을 묶은 것이다.
「알몸 노래」, 「오라, 거짓 사랑아」, 「콧수염 달린 남자가」, 「길 물어보기」의 모두 4부로 나뉘어 있는 『오라, 거짓 사랑아』는 중년에 이른 시인의 일상과 인생에 관한 섬세한 시선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특유의 유연한 문체로 씌어진 시들은 모두 어렵지 않게 읽히지만 중견 시인이 살아온 인생의 무게가 만만찮게 실려 있다.
물개의 집에서
사랑에 대해서라면
너무 깊이 생각해 버린 것 같다
사랑은 그저 만나는 것이었다
지금 못 만난다면
돌아오는 가을쯤 만나고
그때도 못 만나면 3년 후
그것도 안 되면 죽은 후 어디
강어귀 물개의 집에서라도 만나고
사랑에 대해서라면
너무 주려고만 했던 것 같다
준 것보다 받은 것이 언제나 더 부끄러워
결국 혼자 타오르다 혼자 쓰러졌었다
사랑은 그저 만나는 것이었다
만나서 뜨겁게 깊어지고 환하게
넓어져서
그 깊이와 그 넓이로
세상도 크게 한 번 껴안는 것이었다.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이 시인에게 인생은 <장미와 가시, 먹이와 낚싯바늘, 즐거운 나의 집과 무덤>이 거울의 안과 밖처럼 공존하는 시공간이다. 또한 그의 몸속에는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들끓고 있다. 그야말로 인생의 슬픔과 존재의 모순을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모순을 피하지 않는다. 그대로 보듬어 안아 내 살〔肉〕로 만들려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 시로써만 가능해진다. 그래서 이 책에서 보이는 시는 그 누구의 시보다 깊은 아픔을 담고 있으며 또한 기이하게 따뜻하다.
늙은 여자
-여자의 나이
여자들은 서른 살 때부터
자신의 나이를 감추기 시작한다.
아니, 스물아홉 살 때부터
서서히 부끄러워한다. 돌틈새에 끼인
엉겅퀴처럼 미안하게 서른을 산다.
마흔이 되는 날, 촛불 한 개를 켜 놓고
여성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인간이 되는
첫 번째 생일을 맞으리라는
친구여
촛불을 불기 전에 생각해 보아라. 그대
그 날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심지어 여자조차 아닌
아무짝에 쓸모 없는
늙은년이 되는 것뿐이로다
여자 나이 마흔 그리고 쉰
저 푸르고 넉넉한 목초지를
벌써 폐허로 내던져 놓고
그 위로 가죽장화 신은 도적떼들만 지나가고 있다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시인은 거짓된 것이라도 사랑이 오기를 희구한다. 그것은 곧 불모의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을 스스로가 따뜻하게 껴안아 보려는 마지막 몸부림이다. 그래서 슬며시 사라져버린 삶이 자신의 내부에서 다시 한번 꽃피기를 바라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사랑이 오기를 바라는 시간이야말로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과정이 곧 시가 된다.
그런데 이 시인의 시들은 삶의 모순과 존재의 아픔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드러내지만 어디까지나 일상적인 소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문체는 유연하기 그지없다. 오랜 창작 생활이 가져온 중견 시인의 원숙함의 발로일 것이다. 그 나이의 시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서둘러 도통(道通)함을 지어내지 않는 까닭에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응축된 삶의 적나라한 아픔에는 참된 깊이가 내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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