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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by 언덕에서 2013. 1. 14.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민족의 생활사가 반영된 토속적 언어로 그리움의 정한을 표현한 김소월 시인의 대표 시집이다. 표제시 ‘진달래꽃’을 비롯해 ‘먼후일’ ‘산유화’ ‘초혼’ ‘엄마야 누나야’ 등 127편의 주옥같은 시가 실렸다. 근대출판물로서 유일하게 지난해 문화재로 등록됐다. 그만큼 역사적·문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대중에게도 친숙한데 이는 김소월이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송희복 문학평론가는 “세속의 남녀가 서로 사랑했다가 미워하면서 애틋한 그리움의 감정을 되새기곤 하는, 이를테면 수평적인 현실의 부대낌 속으로 파고드는 사랑을 그렸다”고 평했다.

 1925년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반국판. 234면. 김소월 생존 시에 간행된 유일한 시집으로 가장 널리 읽힌 시집이다. 김소월 사후 많은 출판사에서 <소월시집(素月詩集)> 또는 <진달래꽃>이라는 제목으로 많은 유사본이 나왔다. 이 시집은 근대출판물로서 유일하게 2011년 문화재로 등록됐다. 그만큼 역사적·문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대중에게도 친숙한데 이는 김소월이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송희복 문학평론가는 “세속의 남녀가 서로 사랑했다가 미워하면서 애틋한 그리움의 감정을 되새기곤 하는, 이를테면 수평적인 현실의 부대낌 속으로 파고드는 사랑을 그렸다”고 평했다.

 

 1부 《님에게》에 <먼 후일(後日)> 등 10편, 2부 《봄밤》에 <꿈 꾼 그 옛날> 등 4편, 3부 《두 사람》에 <못 잊어> 등 8편, 4부 《무주공산(無主公山)》에 <부엉새> 등 8편, 5부 《한때 한때》에 <잊었던 맘> 등 16편, 6부 《반달》에 <가을 아침에> 등 3편, 7부 《귀뚜라미》에 <옛날> 등 19편, 8부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에 <불운(不運)에 우는 그대여> 등 9편, 9부 《여름의 달밤》에 <오는 봄> 등 3편, 10부 《버리운 몸》에 <우리 집> 등 9편, 11부 《고독(孤獨)》에 <초혼(招魂)> 등 5편, 12부 《여수(旅愁)》에 <여수 1> 등 2편, 13부 《진달래꽃》에 <개여울><산유화(山有花)><진달래꽃> 등 15편, 14부 《꽃 촉(燭)불 켜는 밤》에 <꿈길> 등 10편, 15부 《금잔디》에 <엄마야 누나야> 등 5편, 16부 《닭은 꼬꾸요》에 1편 등 모두 127편이 수록되어 있다.

 

 

금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임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

 

- [개벽] 19호(1922.1)-

 

 

 우리 문학사상 ‘민족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한용운, 이육사, 이상화, 윤동주 등 몇몇을 꼽을 수 있을 뿐이다. 김소월은 이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민족시인이라 불린다.

 앞에 든 시인들이 일제 치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는 저항적 성격의 시를 쓴 민족주의 시인이라 한다면, 김소월은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우리 고유의 전통적 가락에 맞춰 노래해서 민족으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게 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즉, 한용운이나 이육사, 윤동주는 특히 그들이 지닌 사상과 이념 때문에 민족시인으로 불리는 경향이 강하지만, 김소월은 그의 작품이 지닌 민족 문화적인 특성 때문에 민족시인으로 일컬어진다.

 김소월이 이렇게 민족의 사랑을 받는 사인이 된 것은 그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특성 때문이다.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 표지 그림을 그린 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진달래꽃>(「개벽」 25호.1922. 7)-

 

 이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언가 풀 수 없는 응어리가 맺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하는 임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사람의 애달픈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을 미워하지 못하는 착한 마음씨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런 애달프고도 안타까운 마음, 가슴 속에 맺힌 서러움을 ‘한(恨)’이라 한다.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는 바로 이 한의 세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들 흔히 말한다. 소월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인 한을 아름답게 형상화해 낸 시인이기 때문에 자연히 민족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소월이 어느 시인보다도 탁월하게 한의 미학(美學)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행복하지 못했던 삶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소월은 근본적으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소월이 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고 나서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끝내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정신 이상자가 된 마당에 어린이가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소월은 가정에서 그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는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정신 이상자였고, 어머니는 맹목적으로 감싸주기만 하는 무식한 여인이었다. 집안의 절대 권위자였던 할아버지는 완고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장손으로 태어난 소월은 주위에 대화를 나누며 성장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환경 탓인지 그는 몹시 내성적이어서 친구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소월을 둘러싸고 있는 여인들의 생애는 한결같이 불행했다. 시집 와서 4년 만에 남편이 미쳐버린 어머니는 물론, 증조모며 숙모 모두가 남편을 일찍 여의거나 헤어져 살아야 했다. 소월의 시가 여성적인 정조(情調)로 쓰이고 응어리진 한을 표출하게 된 것도 이런 주변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결혼생활도 그리 행복한 편이 아니었다. 가문의 체면과 조부의 강요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하기는 했지만, 그는 아내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 다만, 가장(家長)이라는 의무감에서 참고 살면서 아내에게 잘 대해 주었을 뿐이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시대가 주는 절망과 허무 의식, 그리고 불행한 집안 환경과 불우했던 생은 그를 우울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안으로 응어리진 한을 시 속에 녹여 부었던 것이다.

 

초혼(招魂)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虛空)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빗겨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 <진달래꽃>(매문사.1924) -

 

 소월의 시에서는 리듬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가 쓴 대부분의 시에서 나타나는 이런 리듬은 전래 민요의 리듬을 계승해서 발전시킨 것이다. 또 리듬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민요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즉, 향토적인 소재를 사용하고, 토속적 설화 따위를 배경으로 한 시가 많다는 점, 방언을 자주 사용하고 민요에서 흔히 쓰이는 반복법 등을 애용한 점 등은 민요시라 할 만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정서를 전통적 가락에 실어 아름답게 노래한 소월은 뚜렷한 민족의식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소월은 직접적으로 현실과 대항하여 싸우거나 민족적 투쟁 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의 시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소월은 동시대를 살았던 심훈과 같은 저항시인은 아니다. 그러나 소월은 일제의 관헌에게 모아두었던 시작(詩作) 일체를 압수당했던 일이 있는데, 그때 압수당한 작품의 대부분은 민족의식과 관계가 있는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안도 지방의 명문 민족 학교였던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이 강렬했던 많은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그가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소월은 1934년 32세를 일기로 음독자살하였다. 그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불행하게 살다가, 불행하게 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작품은 그를 가장 사랑받는 민족시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