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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나무가 말하였네 / 강은교

by 언덕에서 2012. 12. 31.

 

 

 

 

나무가 말하였네

 

                          강은교(1945~ )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눕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눈 먼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잎새의 푸른 허리를 위해서

 

 

 

 

- 시집 <어느 미루나무의 새벽노래>(1988)

 

 

 

 

 

 


해 저무는 시간, 들녘의 나무가 말하였고 나무의 말을 간절한 마음으로 옮겨 적습니다. 지독히 아름다운 나무의 말을 사람의 언어로 제대로 옮기지 못한 죄가 한 해의 끝에 남습니다. 나무로 지은 언어의 사원, 시(詩)에 깃들어 오독(誤讀)의 권리를 남용한 죄까지 보태지구요.

 대통령에 당선된 분, 축하드립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국민의 절반가량은 당신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외세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졌고, 정치인들에 의해 동서로 나누어 졌지요. 그것도 모자라 갈린 남쪽은 이제는 보수와 진보, 세대간의 벽이라는 이름으로 찢어졌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기분 좋다고 잊지는 말아주십시오. 처음 정치 입문할 때의 생각, 그리고 대통령 출마하기 전 우리들에게 약속한 것들……. 국민의 반은 당신이 정말 잘해 주리라 믿기에 당신을 뽑은 것이겠지요.

 세상의 모든 나무 앞에 사람의 죄가 눈처럼 소복이 쌓이곤 합니다. 첩첩 쌓인 죄를 곰곰 짚어보고, 나무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듯 정치인들도 국민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할 참입니다. 그러나 여기가 끝은 아닙니다. 나무의 무한한 관용에 기대어 죽는 날까지 나무에게 길을 묻듯 그렇게 처신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무는 해를 뒤로 하고 다시 나무가 말을 합니다. 오라 숲으로, 배워라 나무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을……. 한 해가 이렇게 저뭅니다.

 

 2012년 제 집을 방문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새해에는 좋은 일 많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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