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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성탄제 / 김종길

by 언덕에서 2012. 12. 24.

 

 

 

 

탄제

 

                                        김종길(1926 ~  )

 

어두운 방 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셨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시집 <성탄제>(1969) -

 

 

 

 


 

벌써 오늘이 성탄절이군요. 성탄절에 생각나는 시 한 편 골라보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시에서 노래되는 그리움의 대상은 연인이거나 어머니인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조금 특이하게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회상합니다. 전 10연 중에서 제6연까지가 과거 회상의 부분이고 나머지 네 연이 현재의 모습이군요.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은 그의 어린 시절 어떤 심한 병을 앓았던 때를 되살려 내고 있습니다. 병원도 약국도 없는 시골, 눈이 많이 내리던 12월 하순 무렵이 그 시간적, 공간적 배경입니다. 어린 시절의 그가 앓아누운 방 안에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그 곁을 지키고 있네요. 이 `바알간 숯불'과 할머니의 모습은 어둡고 추운 세계에서 그의 목숨을 지키는 연약한 정성을 암시합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십니다. 약이란 고작... 어두운 밤 눈을 헤치며 따 오신 산수유 열매이네요.

 세상이란 얼마나 넓고 어두우며 추운 것입니까. 잦아들어 가던 어린 목숨은 눈 속에서 약을 구하여 돌아온 아버지의 옷자락에 뜨거운 볼을 부빕니다. 어린 아들과 아버지의 이 모습에서 우리는 다른 시인들이 흔히 노래하지 않는 또 하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시간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군요. 아버지가 눈 속에서 산수유 열매를 따오신 그때는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연상 속에는 성탄절의 의미를 자신의 절실한 경험과 맺어 보는 생각이 깃들이어 있군요.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눈 내리는 저녁을 바라보고 있는 이 역시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 든 불혹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옛날과 다름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그는 불현듯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 어린 시절 눈 내리던 밤 뜨거운 볼에 와 닿았던 서느런 옷자락을 느껴봅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때 아버지가 따오신 산수유의 붉은 알알이 아직도 핏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탄절이라면 흔히 연상되는 도시의 소란스러움 대신 어두운 밤에 내리는 눈을 통해 자연스럽게 과거를 회상하면서 황량한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따뜻한 애정의 기억을 노래한 맑은 작품입니다. 오늘밤, 성탄절 전날 밤 어떻게 보낼 예정이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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