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제
김종길(1926 ~ )
어두운 방 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셨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시집 <성탄제>(1969) -
벌써 오늘이 성탄절이군요. 성탄절에 생각나는 시 한 편 골라보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시에서 노래되는 그리움의 대상은 연인이거나 어머니인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조금 특이하게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회상합니다. 전 10연 중에서 제6연까지가 과거 회상의 부분이고 나머지 네 연이 현재의 모습이군요.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은 그의 어린 시절 어떤 심한 병을 앓았던 때를 되살려 내고 있습니다. 병원도 약국도 없는 시골, 눈이 많이 내리던 12월 하순 무렵이 그 시간적, 공간적 배경입니다. 어린 시절의 그가 앓아누운 방 안에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그 곁을 지키고 있네요. 이 `바알간 숯불'과 할머니의 모습은 어둡고 추운 세계에서 그의 목숨을 지키는 연약한 정성을 암시합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십니다. 약이란 고작... 어두운 밤 눈을 헤치며 따 오신 산수유 열매이네요.
세상이란 얼마나 넓고 어두우며 추운 것입니까. 잦아들어 가던 어린 목숨은 눈 속에서 약을 구하여 돌아온 아버지의 옷자락에 뜨거운 볼을 부빕니다. 어린 아들과 아버지의 이 모습에서 우리는 다른 시인들이 흔히 노래하지 않는 또 하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시간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군요. 아버지가 눈 속에서 산수유 열매를 따오신 그때는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연상 속에는 성탄절의 의미를 자신의 절실한 경험과 맺어 보는 생각이 깃들이어 있군요.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눈 내리는 저녁을 바라보고 있는 이 역시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 든 불혹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성탄절이라면 흔히 연상되는 도시의 소란스러움 대신 어두운 밤에 내리는 눈을 통해 자연스럽게 과거를 회상하면서 황량한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따뜻한 애정의 기억을 노래한 맑은 작품입니다. 오늘밤, 성탄절 전날 밤 어떻게 보낼 예정이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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