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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눈 / 김수영

by 언덕에서 2012. 12. 10.

 

 

 

 

                                          김수영 (1921 ~ 1968)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자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문학예술](1957. 4) -

 


 

요즘 뉴스는 눈소식 일색이군요. 저번 주 금요일에는, 눈이 잘 오지 않는, 제가 사는 부산에도 함박눈이 내리더군요. 위대한 시인 김수영이 쓴 위의 시는 그가 모더니스트로 활약하던 1940년대의 직설적인 시풍에서 탈피, 새로운 서정의 개화를 이룩한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김수영은 '눈'이라는 제목의 시를 세 편 썼는데, 여기 실린 시가 첫 번째의 것이며, 1961년(민중의 상징체로서의 눈)과 1966년(폐허에 내리는 눈)에 발표된 두 편이 있습니다. 이 시들은 구성이나 내용에는 차이가 크지만, '눈'의 이미지만은 비슷하네요. 위의 시에서 표현되는 김수영의 '눈'은 ‘참되고 순결한 생명의 표상’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기침'은 무엇의 상징일까요. '눈'과 대립되는 관념이 아닐까요?

 이 시는 아주 단순한 구조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재인 눈의 순수성을 통해 현실에 대한 울분의 토로와 날카로운 비판으로 순수한 삶에의 지향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눈은 살아 있다'와 '기침을 하자'는 두 구절의 반복으로 의미를 점층적으로 강조하고 있음도 특이하지요.

 김수영은 등단 초기에는 전위적(前衛的)인 모더니스트였습니다. 그러나 1957년 [문학예술]지에 발표된 이 시는 초기의 그의 작품과는 다소 변모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시인들이 빠져있었던 생경(生硬)하고 추상적이고, 직설적인 표현 방법을 이 시에서 상당히 극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결점을 극복했을 때, 이 시인은 보다시피 전혀 색다른 서정의 세계를 열어놓고 있습니다. 눈처럼 싸늘하고 결백한 생명감, 이러한 생명감을 의식하며, 기침을 하는 젊은 시인,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는 눈, 그 눈을 바라보며 밤새껏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뱉고 싶은, 그래서 기침을 하는 젊은 시인, 이것은 현대의 한 젊은 지성인이 느끼고 있는 현실 감각입니다.

 이 시는 모더니즘으로 출발한 시인이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역시 이 시에서는 주지적인 냄새가 풍기며, 그 시상 또한 대단히 비판적입니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자꾸만 기침을 하고 싶어집니다. 새하얀 눈을 바라보며 살아있다는 충동을 절실하게 느끼고, 그래서 생존을 과시하고 싶고, 당시 어두운 시간을 살며 얻은 가슴의 응어리를 뱉어 놓고 싶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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