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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빗소리 / 박형준

by 언덕에서 2012. 11. 26.

 

 

 

빗소리

 

                                         박형준(1966~ )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월간『현대시학』(2009, 7)

 

 

 

 

 

 

 

 

 

 

 


 

 

제목 때문일텐데, 시의 화자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찾아왔던 여인은 가만가만 창문을 흔들었을 법합니다. 술청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여인은 사연이 있어 보일지언정 청승맞지는 않습니다. 시인의 예민한 시선은 소주잔에 남은 여인의 지문에까지 미친 모양이군요. 연상되는 이런 그림들은 모두 마지막 연 빗소리로 모아집니다. 빗소리가 빛처럼 반짝입니다.

 이 시는 창문을 두드리는 작은 빗방울 소리를 밝은 귀로 들으면서 그것이 눈앞에 있는 듯 뚜렷하게 시각화함은 물론 한 사람의 움직임에 겹쳐서 읽어내고 있지요. 비는 사랑을 잃은 여자로 변주됩니다.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려서 찾아왔지만 사랑하는 이가 잠든 창가를 슬금슬금 넘겨다 보고 돌아서고 마는 여인의 동작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한 술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술잔을 손으로 쥐고 있다 자리를 일어서서 떠나간 여인의 뒷자취, 만지작만지작하다 그친 마음의 흔적(지문)에 빗대고 있습니다. 비방(備忘)과 미망(未忘) 사이를 오가는 사모(思慕)의 섬세한 마음, 그것을 빗소리에 빗대고 있는 것이지요.

 시인은 “‘빗소리’에는 연애 감정이 들어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기다림에 대해 써 본 시”라고 소개한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기다리는 주체는 고향입니다. 혹시 내가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해야 맞는 게 아닐까요. 시인은 “나를 중심에 놓는다면 그리움일 테지만 고향에 초점을 맞추면 기다림”이라고 답했습니다. 퇴락한 고향일지라도 언제고 나를 기다리다 불현듯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위안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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